고재종 시인의 담양정자, 시적 풍류의 산실<4>
80년대 초반 마음을 다잡고 공부 하겠다고 소쇄원을 찾아든 적이 있었다
80년대 초반 실의 끝에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하겠다고 소쇄원을 찾아든 적이 있었습니다. 친구의 소개 끝에 찾아든 소쇄원은 그러나 그야말로 유령의 집이었습니다.
거미줄이 얼기설기한 광풍각의 문짝들은 뜯겨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고, 제월당은 누군가 불을 지핀 탓인지 시커멓게 그을린 채 제 본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수풀은 우북하게 짓고, 이곳저곳 돌들은 허물어져 한마디로 소쇄원은 버려진 폐가에 불과했지요.
그러던 것이 유홍준의 문화유산 재발견 덕에 다시 빛으로 드러난 소쇄원은 요새는 다시 그 빛 때문에 고역인가 봅니다. 일단의 관광객으로 거기에 왔다가 “거 별 것도 아닌데 한국 정원미학의 백미니 뭐니 호들갑을 떨었네. 중국의 이화원을 가봐. 이건 새 발의 피지.”라고 투덜대는 대다수의 관광객들로 인하여 몸살을 앓는다고 후손 쪽에선 늘 퉁명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더니 그 후손들은, 요새는 입구에 천막을 쳐놓고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저어하는 입장료라는 것을 받고 있으니, 딴엔 소쇄원의 관리 및 보수비 명목을 들이대는 데야 할 말이 없을 수밖에 없는 셈이 되었지요.
$pos="C";$title="";$txt="새소리와 꽃향기, 대숲 일렁이는 바람까지 잠시 쉬었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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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담양문화원을 일을 하면서 '담양의 누정기행'이란 책을 기획하여 발간한 일이 있습니다. 여러 연구자들의 조사에 의하여 담양에 현재 존재하고 있는 누정이 38개, 그리고 망실되어 문헌기록으로만 존재하는 부존누정이 37개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담양에 이렇게 누정이 많았고 현대에 와서도 왜 누정건립이 계속되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한 일입니다. 삼국시대부터 존재한 걸로 여겨지는 대전면의 척서정, 조선조 초에 건립된 남면의 독수정, 1457년에 지어진 상월정 등을 빼면 담양의 누정건립은 16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활발해집니다.
16세기 조선사대부사회는 훈구파들의 중앙집권문화와 사림파들의 지방분권문화 사이에 심각한 갈등 양상을 빚어내고 있었습니다. 특히 조광조의 죽음을 가져오게 한 기묘사화는 재야 사림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호남 사림은 누각과 정자 중심의 예향을 형성해나갔습니다
이로부터 사림파들은 중앙정치에 연연해하지 않으며 향토 근거지에 장원과 원림을 조성하게 되는데 지역적 특성이 반영되었습니다. 영남 사림은 서원과 서당 중심의 학맥을 조성하고 있었던 데 반하여 호남 사림은 누각과 정자 중심의 예향을 형성해나갔습니다. 영남이 산악지대이고 호남이 비산비야(非山非野)의 환경이라는 문화지리학의 특성 때문이기도 한데, 특히 죽림에 둘러싸인 담양 일대에서 시인묵객들의 누정이 밀집되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전남대 김신중 교수는 위 책에서 그런 누정의 성격을 시문의 산실, 강학의 전당, 원림의 중심, 유흥 상경처, 은일 소요처, 선인 추모처, 유생 휴식처, 향약 시행처, 문중 종회소 등의 문화공간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고려 5백년 역사에서 최고의 문장가이자 가장 뛰어난 시인이었던 이규보는 '사륜정기'(四輪亭記)라는 글에서 정자를 일컬어 “사방이 탁 트이고 텅 비고 높다랗게 만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정자는 물리적 높이뿐 아니라 정신적 높이까지도 감안한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주석한 이어령교수는 사방이 탁 트였다 함은, 동서남북 360도로 모두 열려져 있는 개방성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저만큼 뒷녘으로 청산과 구름이 병풍을 치는 것은 어찌할 수 없겠지요.
$pos="C";$title="";$txt="호남 정자는 의미의 아름다움까지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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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비어 있다 함은, 일반적인 주거지처럼 무엇인가를 꽉 채우기 위한 욕망과 소유의 공간이 아니라 시를 짓고 술을 마시고 풍취에 젖기 위한 것이라고 했거니와, 그래도 푸른 바람과 맑은 햇빛이 정자의 주인노릇 하는 것 또한 막을 수 없겠습니다.
높다랗다 함은, 정자는 강가의 절벽이나 산언덕이나 조망권이 가장 좋은 곳에 지은 물리적 높이뿐만이 아니라 그 높이에서 두루 포괄하고 통할할 수 있는 정신적 높이까지도 감안한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앞에 펼쳐진 들판과 강물, 뒤에서 흘러드는 새소리와 꽃향기가 모두 통섭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탁 트여 열려 있으니 장벽과 경계를 허물고 누구나 그곳에 들어가 교감할 수 있고, 텅 비어 있으니 욕망과 소유의 톱니바퀴에 치인 마음을 잠시나마 깨끗이 비워낼 수 있고, 높다란 데 있으니 저질과 속악에 처한 자신을 성찰하고 새로운 품위와 높이의 인간으로 일신할 수 있는 곳인 바, 이는 현대자본문명의 여러 역기능을 씻는 대안으로 제시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자는 퀴퀴한 냄새에 절은 전통문화가 아니라 되레 오늘날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오래된 미래’인 것입니다.
나는 너를 보고 너는 나를 볼 때
옆에선 느티나무에 씻긴 바람도 감아든다
너는 내게 말하고 나는 네게 말할 때
다른 옆에선 휘파람새소리도 끼어든다
내가 네 안을 들여다보니 앞강물이 반짝이고
네가 내 밖을 넘어보면 뒷산정이 우뚝하다
사방이 탁 트이니 무논에서 쟁기질하던 노인이
초록빛과 구름의 병풍을 치며 올라오고
심중이 텅 비니 아까 나갔던 나비 한 쌍이
바람과 수수꽃다리 향기를 몰고 들어온다
아래께선 요 근래 부시의 일방적 폭격이 있었다
이렇게 높다란 데서 우리는 두루두루 웃고
아래께로 다시 고추 모종 놓으러 간다
$pos="C";$title="";$txt="갈 곳 잃은 길손들이 들러 세상 시름을 놓는데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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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에서'라는 나의 졸시인데, “사방이 탁 트이고 텅 비고 높다랗게 만든” 정자에 올라앉아 아수라와 같은 현실을 비웃으며 한번쯤 그저 신선놀음을 해보는 여유도 가졌으면 하는 생각해서 썼던 것입니다. 누구 한 사람쯤이라도 소납(笑納)했으면 좋겠습니다.
알랭 드 보통의 여행 에세이 '여행의 기술'이란 책에 보면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계속하여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 간다.”라는 구절이 이어집니다.
나는 유홍준 교수의 문화유산답사기 식으로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라는 여행의 묘책이나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답사의 모범답안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나의 여행은 ‘나’라는 무거운 주체를 타자의 공간에로 방목해버리는 걸로 만족할 때가 더 많습니다.
시골길을 타박타박 걷다가 어느 삼거리 주막집에서 김치 쪼가리에 막걸리 한 잔을 들이켜고 흥얼대거나, 어느 바닷가의 여인숙에서 며칠이고 누워 헐거운 창문으로 들려오는 파도소리를 진력나게 듣거나, 또는 이제 폐허가 다 된 어느 간이역 대합실의 삐걱거리는 나무의자에 멍청하게 앉아 그 쓸쓸함과 고적감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에서 나의 존재감을 훨씬 더 확인할 때가 많은 것이지요.
$pos="C";$title="";$txt="대숲처럼 푸르른 시대는 아직 멀었을까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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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알랭 드 보통의 말대로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합니다. 아니 큰 광경이 큰 생각을 요구하는 것이겠지요. 나에게 담양의 정자들은 큰 광경입이다. 그것들은 내가 태어난 나의 고향의 광경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담양의 정자들은 나에게 그것들을 대함에 앞서 ‘내적인 사유’를 준비물로 가져오길 원합니다. 조선의 선비들과 그들의 정신, 그들의 학문과 예술, 그들의 꿈과 사랑이 중첩된 정자를 그냥 방목의 심정만으로 대할 수 없는 소이연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지요.
담양의 정자들은 내게 있어 ‘의미의 아름다움’입니다
담양의 정자들은 내게 있어 ‘의미의 아름다움’입니다. 의미란 해석적이기에 직관적인 느낌으로 감지되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듯합니다. 하지만 다른 것은 다 차치하고라도 담양의 정자들은 시적풍류의 산실만으로도 아름다움입니다. 담양의 정자에서 산출된 가사(歌辭)만 해도 현재 이서의「낙지가」등 18편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만나면 우리는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삶 속에서 거기에 무게를 부여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누구처럼 “왔노라, 보았노라, 의미가 있었노라”라고 외치고도 싶어집니다. 담양 정자를 볼 때마다 느끼는 이 아름다움은 나의 삶 속에서 큰 의미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탁 트이고, 텅 비고, 높다란 데 있는 정자의 정신적 의미와 그 주인들의 선비정신 및 시적풍류는 내게 주어진 여생이 다 할 때까지 나의 아름다움으로 찬연한 빛을 발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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