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타그램]몇 걸음 뒤에서 바라보는 세상

한 걸음 물러서 객관의 화각으로 바라보면 구체적 개인들이 보인다.
타인은 무리 속 한 점이 아니라 작은 우주의 중심이다.

플랑드르 화가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의 그림 '베들레헴의 인구조사(1566)'에는 주인공이라 생각되는 인물이 없다. 사람들로 붐비지만 소란스럽지 않은 중세 마을의 겨울 풍경이다. 여전히 많은 시각예술에서 주제를 시각적 중심에 두는 것과는 달리, 그저 다양한 사연을 지닌 각자의 시간을 정지시켜 놓은 것처럼 보인다. 작은 개인들의 각기 다른 모습과 행위가 섬세하게 그려졌다. 요즘 말로 깨알 같다. 그런데 이 그림 속 여러 사람 사이에 그들과 큰 차이 없는 비중으로 묘사된 성모 마리아가 있다. 관리에게 세금을 바치기 위해 모여 서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 뒤로 예수를 잉태한 동정녀 마리아가 당나귀를 타고 그곳에 막 도착했다.

당시 로마와 유럽 화가들이 주로 성서의 빛나는 순간들을 그렸던 것에 비해 브뤼겔은 소박하고 관조적이어서 차갑기까지 한 순간을 그렸다. 이 목가적 시간의 그림에는 화가가 말하고자 하는 엄혹한 현실이 숨어있다. 의도를 직설로 드러내는 것도 예술이 하는 일이지만, 진의는 때로 무심한 모습 속에 묻혀 있다가 아주 천천히 드러나기도 한다. 그림에 숨어있는 이야기는 민초들의 고통이었다. 화가는 남의 나라 스페인 영주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 혼란스럽고 부조리한 당시 상황을 예수 탄생 직전 베들레헴의 풍경 속에 숨겨놓았다.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브뤼셀 올드마스터즈 박물관

성모 마리아뿐 아니라 그림 속 모든 사람은 각자의 절박한 순간들을 살아내고 있다. 삶의 순간들은 절박해도 타인의 눈에 평범하고 사소해 보일 뿐이다. 세상의 고통과 절실한 순간들은 시각의 중심에 부각되지 않고 개별적인 시간 속에 외롭게 던져져 있다. 그렇게 객관의 화각 속에서 각자의 시간이 지나가고, 화가는 그것을 주장하지 않고 보여주거나 언급할 뿐이다.

길거리에서 스쳐 가는 수많은 사람을 대중이라는 무리 중 한 점으로만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그도 타인에게는 그저 한 점으로 보이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그림을 찬찬히 구석구석 바라보면 보이지 않던 이야기들이 보인다. 사진도 메시지만을 앞세우지 않고 몇 걸음 밖에서 찍은 여러 개인들의 모습에 더 눈이 갈 때가 있다. 수십 년 전 선배 사진가들이 찍은 사람 가득한 풍경 사진이 여전히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도 비슷하다. 그 속의 사람들은 그저 작은 피사체가 아니라 각자의 삶에서는 우주의 중심이다.

이런 화각처럼 세상을 한 걸음 물러서 찬찬히 바라보면 우리가 늘 무시하고 지나치는 구체적 개인들의 삶이 보인다. 눈 밝은 사람에게는 그 많은 타인들 중 한 명인 '나'도 보일 것이다.

사진팀 허영한 기자 younghan@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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