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기자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3차 상법 개정안의 핵심 화두로 떠오르면서 기업들이 가장 먼저 꺼내든 카드는 교환사채(EB)였다. 자사주 소각으로 경영권이 위태로워질 바에 이를 기반으로 발행한 EB를 우호 세력에게 넘기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다.
시장의 시선은 싸늘했다. 자사주 소각을 통한 주주 환원 확대와는 거리가 먼 얘기이기 때문이다. 제3자가 사들인 EB가 주식으로 교환되면 의결권이 살아나고 기존 주주의 지분율은 희석된다. 사실상 제3자 배정 유상증자와 동일한 효과다. 주주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 이유다. 언론에선 자사주 소각을 회피하려는 '꼼수'임을 지적하는 기사가 연일 쏟아졌고, 주가 폭락에 부랴부랴 EB 발행을 철회하는 기업도 속출했다.
여론의 뭇매로 잠잠해지는 듯싶었던 기업들의 자사주 처분 꼼수는 최근 '자사주 맞교환'이란 형태로 되살아나는 분위기다. 이달 초 이종 산업간 협력 사례로 이목을 끈 주류업체 무학과 자동차 부품사 삼성공조의 40억원 규모 자사주 교환이 대표적이다. 해당 교환으로 삼성공조는 보유하고 있던 자사주를 몽땅 털었고, 무학은 절반을 덜어냈다. 이들은 '상생협력 강화'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설득력은 떨어졌다. 양사 모두 경남 창원을 연고로 한다는 점 외에는 이렇다 할 사업상 접점이 없어서다. 지난달 완구 기업 오로라와 아웃도어 위탁생산(ODM) 업체 동인기연의 자사주 교환도 마찬가지다.
적대적 M&A의 위협에서 회사의 주도권을 지키고, 흔들리지 않는 경영 환경을 만드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자사주 기반 EB 발행과 자사주 맞교환 모두 특별한 비용 없이 우호 지분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인 만큼 기업들엔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다. 자사주를 우호세력에 처분하는 것이 현재 우리나라 기업들의 사실상 유일한 경영권 방어수단인 점도 참작해야 한다. 그러나 단순히 대주주의 지배력 강화를 목적으로 자사주 소각 회피 수단을 강구하는 기업들의 모습은 씁쓸함으로 다가온다.
정부가 주도하는 주주환원 확대 정책은 결국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꼬리표를 떼기 위한 과정이다. 기업들이 먼저 발 벗고 나서지 않으면 성공하기 힘든 일이다. 자사주 소각을 회피하려는 일련의 조치들이 단기적으로는 기업의 재무 지표를 개선하고 경영권을 방어하는 데 효율적일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주주 가치를 훼손하고 한국 자본시장의 신뢰를 실추하는 '제 살 깎아 먹기'가 될 수 있다. 자사주는 방패로만 쓰는 게 아니라, 주주가치를 높이는 든든한 도구가 돼야 한다. '백기사' 찾기에 혈안이 된 기업보다는 주주 환원을 자처하는 '흑기사'가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