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주52시간 족쇄 찬 AI업계, 기적은 없다

"하루에 8시간씩 70도 온도로 1000일을 끓여보시고요, 물이 끓는 기적이 발견되면 알려주세요."

기획 기사 'AI 전쟁터의 시간, 52시간에 갇히다' 관련 설문조사를 하던 중 만난 인공지능(AI)업계 관계자는 IT분야에서 통용되는 물 끓는 이야기를 주52시간 근무 규제로 속앓이를 하는 상황에 접목해 이렇게 설명했다. 물이 100도에서만 끓는 것처럼 개발 업무는 100도에 도달할 때까지 몇 주라도 밤을 새워 몰입해야 한다. 물이 끓는 성과를 달성한 후 쏟아부었던 시간만큼 쉬어도 된다는 게 개발자들의 암묵적 규칙이다.

기적을 바라듯 AI를 연구·개발하는 기업들이 주52시간 근무제를 지키면서 해외 기업을 능가하는 것은 불가능한 임무처럼 보였다. AI 산업의 발전 시차는 계속해서 짧아지고 있는데 하루 8시간, 주단위로 끊어지는 업무 시간 제한이 계속 발목을 잡고 있어서다. 노동자의 건강권을 우려하는 일각에서는 사람을 더 뽑으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개발 업무는 단순 제조업이 아니어서 투입된 인원수에 비례한 결과를 내놓지 않는다. 초보 개발자 여러 명을 더 뽑아서 일한다고 하더라도 숙련된 개발자 한 명과 같지 않은 것이 AI 개발 업무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개발 업무면 모를까 수준 높은 개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선 고용을 늘리는 일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도 사무실에서 먹고 자고 하며 하루 16시간 일한다는데…." 미국은 물론 중국 기업들까지 밤낮 가리지 않고 AI 기술 개발에 열정을 다하고 있다. 압도적인 자본력까지 내세운 2강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시간이라도 투자해야 하는데, 한국의 근로기준법은 이를 막고 있다. 이미 선두 경쟁에서 뒤처진 AI 기업들은 이대로라면 한국이 점점 더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물론 대통령실까지 나서서 AI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정작 규제 완화가 절실한 주52시간 예외에 관한 질문은 회피하고 있다.

진정한 노동 유연성은 업종의 특성에 맞게 자율성을 부여하는 데서 시작된다. 건설이나 제조업처럼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 보호를 위해 근로 시간 제한이 엄격해야만 하는 업종도 존재한다. 고부가가치 산업인 AI 업종에까지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는 일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시간제 감시와 감독으로는 미래 산업의 주도권을 잡을 수 없다. 하루라도 빨리 주52시간 예외를 법제화해 AI 업계의 숨통을 트여줘야 한다. 너무 늦으면 국내 AI 기업들은 설 자리가 아예 없어질지도 모른다.

기획취재부 이현주 기자 ecolhj@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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