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준기자
내년 초 6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4) 양산을 앞둔 전환기에도 5세대 HBM3E 수요가 꺾이지 않으면서 가격이 오르는 이례적인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엔비디아의 H200 중국 수출 재개 가능성과 함께 구글·아마존웹서비스(AWS) 등 글로벌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의 주문이 확대된 영향이 맞물린 결과로 풀이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HBM3E 단가를 인상하고 나섰다.
29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내년 HBM3E 계약 단가를 기존보다 약 20% 인상했다. 시장에선 HBM3E 가격이 차세대 제품 단가에 근접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최근 HBM3E 8단은 300달러 안팎, HBM3E 12단은 300~500달러 수준까지 오른 것으로 전해졌다. HBM4는 500달러 중반대로 예상된다. 세대교체를 앞두고 가격 격차가 좁아지는 건 이례적인 흐름이다.
그래픽처리장치(GPU)·주문형반도체(ASIC) 개발로 HBM3E 수요는 늘어나고 있지만, 주요 메모리 기업들이 HBM4·범용 D램 생산에 집중하면서 공급자 우위 구도가 한층 강화됐다는 평가다. 차세대 제품 양산을 앞둔 상태에서 이전 세대 제품 가격이 오르는 건 드문 일이다.
업계에선 엔비디아의 중국 수출이 본격화할 경우 파급효과가 클 것으로 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최근 수수료 25% 부과를 조건으로 H200의 중국 수출을 허용했다. 초기 출하량은 4만~8만개로 추정되며, 엔비디아는 기존 재고로 물량을 처리한 뒤 내년 상반기부터 중국 수출용 H200 생산량을 크게 확대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내년부터 HBM4 시장 개화로 세대 전환이 이뤄질 예정이었지만, 엔비디아의 중국 수출 재개로 기존 HBM3E 수요도 상당 기간 유지될 거란 관측이다.
글로벌 빅테크의 AI 경쟁이 가열되는 것도 가격 인상을 지지하고 있다. AI 반도체 시장에서 엔비디아의 비중이 예년보다 다소 낮아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와도, 다른 빅테크의 HBM 채택이 확대되는 만큼 공급사의 수혜는 계속될 거란 평가다. 내년 출시를 앞둔 엔비디아의 '루빈'을 제외하면, 주요 제품들은 대부분 HBM3E를 채택한 상태다. 엔비디아가 중국에 수출할 H200에는 HBM3E 8단 스택 8개가 탑재됐고, 구글의 7세대 텐서처리장치(TPU) 또한 같은 구성을 적용했다. AWS가 내년 양산할 것으로 예상되는 트레이니엄3(Trainium3)에는 HBM3E 12단 스택 4개가 들어갈 전망이다.
메모리 기업들은 내년 엔비디아 루빈을 중심으로 HBM4 초기 공급을 확보하는 한편, 기존 HBM3E 시장에선 가격 인상을 통해 수익을 끌어올리는 이중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의 경우 HBM3E 양산 초기에 품질 문제로 납품 속도가 지연됐지만, 지난 3분기 엔비디아·브로드컴 공급을 확정하며 반등에 성공했다. 2분기 대비 3분기 HBM3E 판매량은 갑절(1.8배) 가까이 늘었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3분기 글로벌 HBM 시장 매출 점유율은 22%로, 마이크론을 제치고 업계 2위를 회복했다. SK하이닉스는 꾸준히 과반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내년 HBM 시장 규모는 올해보다 약 23% 성장해 69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금액 기준으로는 HBM4 55%·HBM3E 45% 구도가 예상된다. 업계 관계자는 "아직 중국이 H200 구매를 승인하지 않았지만, 엔비디아의 수출 재개가 HBM3E 수요를 확실하게 받쳐줄 것"이라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HBM 매출 기반을 확대할 경우 공급 개시가 늦었던 삼성의 실적 개선 폭이 더 클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