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이후의 우리 사회, 재 위에서 공존을 묻다[슬레이트]

'아바타: 불과 재'가 던지는 질문
상실 이후에도 공동체는 가능한가
제임스 캐머런이 꺼내 든 공생의 윤리
분열의 시대, 폭력·상실 건너는 공동체 조건은

영화 '아바타: 불과 재' 스틸 컷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아바타'는 언제나 '볼거리'로 불려왔다. 그러나 '아바타: 불과 재'에 이르러 이 시리즈는 더 이상 기술 시연의 집합에 머물지 않는다. 전쟁의 스펙터클보다 상실 이후 남겨진 시간에 더 오래 머문다. 불이 모든 것을 태우고 남겨진 재 위에서 세계는 어떤 윤리로 다시 조립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판도라를 넘어, 분열이 일상이 된 오늘의 사회를 향한다.

영화는 재의 상태에서 출발한다. 불이 파괴의 사건이라면, 재는 그 이후에 남겨진 조건이다. 역사 속에서도 재는 늘 새로운 질서의 시발점이었다. 1666년 런던 대화재 이후 도시는 폐허가 됐지만, 그 위에서 사람들은 재건을 위한 규칙과 법적 기준을 세웠다. 재건 과정에서 목재 대신 벽돌과 석재 사용이 의무화됐고, 건물의 높이와 벽 두께, 거리 폭 등에 대한 규제가 함께 도입됐다.

재난이 도시를 무너뜨렸다면, 사회는 그 이후를 감당하기 위한 제도를 만들어왔다. '아바타: 불과 재'는 파괴 이후에 남겨진 시간을 따라간다. 그 속에서 공동체는 어떻게 다시 작동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영화 '아바타: 불과 재' 스틸 컷

상실이 공동체를 갈라놓을 때

'아바타: 불과 재'는 상실로 시작한다. 가족은 구성원의 죽음 앞에서 하나로 묶이지 않는다. 같은 슬픔을 겪었지만 이를 견디는 방식이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죄책감을 느끼며 허공을 날고, 다른 이는 신에 귀의해 의미를 찾으며, 또 다른 이는 일에 몰두해 분노를 덮는다. 상실이 결속의 계기가 되기보다, 관계의 온도 차를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캐머런 감독은 가족을 이상화하지 않는다. '하나'라는 선언 대신, 애도가 어긋나는 순간을 응시한다. 사회학적으로 애도는 개인의 감정이면서 동시에 공동체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집단은 장례와 의례를 통해 슬픔을 공유하며 다시 연결된다. 그 과정이 실패하면 감춰졌던 균열이 표면으로 드러난다. 하나가 되지 못한 설리 가족의 모습은, 분열된 사회가 맞닥뜨리는 초기 국면을 닮아있다.

캐머런 감독은 이 지점을 이번 영화의 핵심으로 짚는다. 그는 "상실과 슬픔, 트라우마가 어떻게 폭력의 고리를 만들고, 그것을 어떻게 끊을 수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아바타: 불과 재'의 서사에서 애도는 위로의 문제가 아니다. 폭력의 순환을 멈출 수 있는가를 묻는 윤리적 질문으로 확장한다.

영화 '아바타: 불과 재' 스틸 컷

이때 균열은 '신의 침묵'이라는 문제로 이어진다. 누군가는 신비로 받아들이고, 또 다른 이는 배신으로 규정한다. 같은 신을 두고도 믿음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진다. 이는 오래된 신정론의 논제다. 고통과 악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믿음이 위안의 대상이 아니라, 책임을 배분하는 기준으로 작동한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은 이러한 인식 전환이 집단적으로 드러난 사례다. 재난 이후 "이것이 신의 뜻인가"라는 물음이 종교의 영역을 넘어 정치·제도의 언어로 이동했다. 재난을 해석하는 방식이 바뀌면서, 도시 재건과 책임 소재, 공공 안전은 논의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신의 침묵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지 않았다. 대신 인간이 스스로 책임의 언어를 발명하도록 만들었다. '아바타: 불과 재' 속 세계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신의 침묵이 단결을 낳기보다, 서로 다른 윤리를 선택하게 한다. 그리고 그 충돌은 갈등의 출발점이 된다.

캐머런 감독은 이 대립을 선악의 도식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원주민은 피해자이자 선하다는 전제에서도 벗어난다. 화산 재해로 터전을 잃은 망콴족은 더 이상 에이와를 신뢰하지 않는다. 자연이 자신들을 외면했다고 믿으며, 생존을 위해 인간과 손잡는다.

식민의 역사 역시 이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원주민과 침략자라는 이분법이 현장에서 쉽게 성립하지 않았다. 삶을 연장하기 위해, 권력을 지키기 위해 집단들은 동맹을 맺고 등을 돌리며 유리한 쪽으로 이동했다. 윤리는 '순수'라는 말로 정리되지 않았고, 선택에는 늘 대가가 따랐다.

영화 '아바타: 불과 재' 스틸 컷

파괴에서 의미의 재구성으로

망콴족을 이끄는 바랑의 서사는 '아바타: 불과 재'에서 가장 불편한 지점을 드러낸다. 화산이 폭발한 뒤, 그들은 신에게 기도했지만 응답받지 못했다. 침묵은 분노로 바뀌었고, 믿음은 불로 전환됐다.

여기서 불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다. 신화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조건에서,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기 위한 하나의 언어로 기능한다. 파괴 그 자체라기보다, 상처를 경험한 공동체가 그 고통을 어떤 방식으로 외부화하고 공격적인 방향으로 전환하는지를 드러내는 장치다.

바랑이 불을 다루는 법을 익히는 과정은, 재난 이후 고통을 책임의 언어로 전환해 온 인간 사회의 선택을 응축한다. 그 선택이 공존을 향하느냐, 파괴를 향하느냐에 따라 공동체의 궤적은 완전히 달라진다.

영화 '아바타: 불과 재' 스틸 컷

연결은 선택이다

작품이 끝내 도달하는 지점은 '공생'이다. 특히 스파이더의 서사는 혈통이나 종족이 아닌 관계를 기준으로 공동체를 다시 그린다. 몸이 다르다는 이유로 경계에 놓였던 존재가, 어느 순간 연결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공동체를 무엇으로 정의할 것인가를 다시 묻는 대목이다.

이번 작품에는 실크로드의 유목 상단에서 착안해 창조했다는 '바람 상인' 집단이 등장한다. 교역과 이동, 교환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이들은 전쟁과 정복이 아니라 교류와 연결이 역사를 움직여왔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실크로드는 물건만 오간 길이 아니었다. 언어와 기술, 종교와 사상이 뒤섞이며 문명을 확장시킨 통로였다. 위험을 동반한 연결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문명의 성숙을 가르는 기준이 됐다.

이 관점은 현대 생태철학과 생물학의 시선과도 맞닿아 있다. 공생은 예외가 아니라 조건이며, 서로 다른 존재가 결합할 때 생명은 진화해왔다.

영화 '아바타: 불과 재' 스틸 컷

지금 우리 사회는 분열돼 있다. 정치 진영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사회적 갈등은 도덕적 확신으로 굳어간다. 이런 상황에서 '아바타: 불과 재'가 던지는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폭력 이후에도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

캐머런 감독은 이 질문에 쉬운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상실을 견디는 방식의 불일치, 믿음의 균열, 내부의 배신과 연합을 차례로 보여준 뒤에야 비로소 희미한 가능성을 비춘다. 현실의 공존은 더 어렵다. 언제나 불완전한 제도와 지워지지 않는 기억 위에서 간신히 작동해왔다.

그럼에도 공존이 가능하다고 믿게 만드는 윤리는, 개인보다 관계를 먼저 놓는 사유에서 출발한다. 아프리카 공동체 철학인 우분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리가 있기에 존재한다." 존재가 개인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성립된다는 관점이다. '아바타: 불과 재'가 제시하는 공생의 윤리는 바로 이 지점에 닿아 있다.

영화 '아바타: 불과 재' 스틸 컷

불은 세계를 태운다. 하지만 재 위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문제는 그 삶이 증오의 반복이 될지, 관계의 재구성이 될지다. 이 작품이 분열의 시대에 남기는 가장 큰 유산은, 그 선택을 끝까지 회피하지 않는 태도다. 연결은 감정이 아니라 결정이며, 공존은 결말이 아니라 지속되는 과정이다. 판도라의 재 위에 던져진 물음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도 그대로 떨어진다.

문화스포츠팀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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