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은모기자
"와인은 인간을 동물과 구분해 주는 예술이다. 좋은 와인이 없어도 우리는 살 수 있지만 그런 삶에는 예술이 없고 감동이 없다."
이탈리아 피에몬테 바롤로의 와이너리 '지디 바이라(G.D. Vajra)'를 이끄는 2세대 와인메이커 주세페 바이라(Giuseppe Vaira)는 최근 아시아경제와 인터뷰에서 아버지에게 들은 이 한마디가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고 말했다. 의대 입시를 통과하고도 결국 포도밭과 와이너리로 돌아온 그는 "와인메이킹에 참여한다는 건 사람들의 삶을 조금 더 고양시키는 일에 손을 보태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시아경제와 인터뷰를 진행한 주세페 바이라(Giuseppe Vaira) '지디 바이라(G.D. Vajra)' 와인메이커.
바이라 가문은 1600년대부터 바롤로 언덕을 일군 오래된 농가다. 바롤로 마을 인근 베르뉴(Vergne)의 고지대 포도밭을 중심으로 네비올로부터 바르베라, 돌체토, 프레이자, 모스카토까지 다양한 품종을 재배한다. 1970년대부터 와이너리 설립자이자 주세페의 아버지인 알도 바이라(Aldo Vaira)가 유기농 재배를 시작해 피에몬테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유기농 인증을 받은 생산자 가운데 한 곳으로 꼽힌다.
가족 경영 와이너리의 배경을 갖고 있지만 알도 바이라는 자녀들에게 가업 승계를 강요하지 않았다. 주세페는 "아버지는 늘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지만 한 가지 조건은 분명히 했는데, 바로 중간은 없다는 것이었다"며 "무엇을 하든 진심으로 끝까지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회상했다. 그의 선택지는 결국 의사와 와인메이커로 좁혀졌고, 그때 아버지에게 "와인메이킹의 사회적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잠시 침묵하던 아버지는 다이닝에 걸린 콘스탄티노 루게리(Constantino Ruggeri)의 작품을 가리키며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그림, 시, 음악 같은 예술 없이도 살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없는 삶은 훨씬 가난한 삶이다. 와인도 마찬가지다. 와인은 인간이 한 단계 더 고양된 존재로 살아가게 해 주는 도구다." 그 순간 와인은 주세페에게 단순한 가업이 아니라 자신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직업이 됐다.
지디 바이라의 '브리코 델레 비올레(Bricco delle Viole)' 포도밭 전경.
아시아경제와 인터뷰를 진행한 주세페 바이라(Giuseppe Vaira) '지디 바이라(G.D. Vajra)' 와인메이커.
바롤로 세계에는 오랫동안 '전통주의 대(對) 현대주의' 논쟁이 이어져 왔다. 지디 바이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바롤로 마을이 인구 600명 남짓의 작은 공동체이다 보니 어린 시절 친구들의 "너희 아버지는 전통주의자래", "아니야, 현대주의자래"라는 말에 주세페 본인조차 헷갈릴 정도였다. 주세페는 이런 이분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스타일을 '클린 트래디셔널(Clean Traditional)'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우리가 말하는 전통주의는 변화가 두려워 과거에만 머무르려는 태도가 아니다"라며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뿌리를 지니고 있는지 존중하되 매 빈티지 조금씩 더 나아지려는 태도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철학은 양조 방식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긴 침용 발효, 대형 슬로베니아 오크 사용, 포도밭 관리 방식 등 기본 구조는 전통적인 바롤로 양조법을 충실히 따른다. 하지만 전통적 기반을 유지하는 동시에 현대적 감각을 반영한 세밀한 개선을 지속해왔다. 삼중 수작업 포도 선별, 매일 아침 모든 배럴 테이스팅, 캐스크별 향·구조 프로파일링 기록 등이 대표적이다. 전통주의와 현대주의의 대립 구도에 자신을 끼워 넣기보다 '접근성이 좋고 순수한 과실미를 보존하는 바롤로'라는 목표를 향해 작은 변화를 꾸준히 축적하는 방식이다.
주세페는 바롤로를 바라보면 '들판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이미지'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그는 "별은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구가 자전하는 동안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며 "잔속의 바롤로 역시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공기와 만나 향과 맛, 질감이 끊임없이 달라진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다른 와인들은 향만 맡아도 대략 어떤 맛일지 짐작되는 경우가 많지만 바롤로는 그렇지 않다"며 "한 번 향을 맡고 끝나는 와인이 아니라 한 잔을 두고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게 만드는 와인"이라고 표현했다.
'바롤로 브리코 델레 비올레(Barolo Bricco delle Viole)'
주세페 바이라 와인메이커는 지디 바이라를 대표할 수 있는 와인으로 '바롤로 브리코 델레 비올레(Barolo Bricco delle Viole)'를 꼽았다. 그는 "브리코 델레 비올레는 우리 가족의 영혼을 대표하는 포도밭"이라며 "고도가 높고 토양도 독특해 '바이라 스타일'의 바롤로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 주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바롤로 브리코 델레 비올레는 잘 익은 자두와 블랙체리 향이 약간의 미네랄 터치와 함께 굳건하고 힘 있는 타닌의 맛이 느껴진다. 지디 바이라의 바롤로 중 강인하고 남성적인 스타일을 지닌 와인으로 평가된다.
다른 와인들이 곁가지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우리는 아직 2세대에 불과한 젊은 와이너리"라며 "우리 안에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 다양한 와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롤로 알베(Albe)'와 '랑게 네비올로(Langhe Nebbiolo)', 엔트리 레벨 와인인 '랑게 로쏘(Langhe Rosso)'다. 싱글 빈야드 바롤로에 비해 가격대는 낮지만 그는 "품질 측면에서 보면 같은 지역의 다른 싱글 빈야드 바롤로들과 충분히 겨뤄볼 만하다"고 자신했다.
그에게 매 빈티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한 해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지금은 웬만한 건 다 클라우드에 백업돼 있어 뭔가를 잃어버려도 다시 복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지만 농업에는 백업이 없다"며 "한 해 수확이 좋지 않다면 다시 시작하는 데 365일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힘들고 지칠 때마다 다시 포도밭으로 이끄는 힘 역시 이 '되돌릴 수 없음'에 대한 자각"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말처럼 바롤로 한 잔은 단순한 술이 아니라 한 해의 기다림과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에 대한 기록에 가깝다. 지디 바이라의 바롤로가 조용하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이유도 어쩌면 그 담담한 기록의 태도에 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