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투자가 띄운 금산분리 완화론…부처별 시각차로 진통[Why&Next]

공정위, 빗장 해제 신중모드

인공지능(AI) 등 신산업 투자 활성화를 위한 금산분리 완화를 두고 정부부처 내 입장차에 따른 혼선 기류가 짙다. 주무부처 수장인 주병기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은 "수십 년 된 규제를 몇 개 회사의 민원 때문에 바꿀 수 없다"면서 재벌의 금융사 사금고화와 경제력 집중 부작용에 대한 우려를 정면으로 드러냈다. 규제 완화의 대표적인 수혜기업으로 꼽히는 SK를 겨냥한 발언으로, 앞서 규제 완화 가능성을 시사한 대통령실·경제부처들과도 확연하게 다른 톤이다. 조원 단위 대규모 투자가 가능하도록 펀드운용사(GP)를 허용해 주는 방안에 대해서도 현 규율 체제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기업들이 사내 유보금을 활용하거나 채권 발행·유상증자 등 금융시장을 통한 전통적인 조달 방안을 먼저 검토한 뒤 금산분리 규제 완화를 최후의 수단으로 두겠다는 것이다.

연합뉴스

43년 된 금산분리 규제…현 체제론 AI 대규모 투자 어려워

금산분리는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을 소유하거나 지배하면 안 된다는 원칙이다. 재벌기업(산업자본)이 금융기관을 사금고화하는 것을 막자는 취지로 1982년 도입됐다. 혁신 스타트업 투자에 대한 수요가 커지면서 2021년 12월 관련법이 일부 완화됐으나 재벌의 경제력 집중과 산업자본 부실 위험이 금융으로 전이되는 것을 막기 위한 핵심적 규제 중 하나로 여전히 강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경제계는 43년 전 만들어진 이 낡은 규제가 현재 기업 환경과 맞지 않는다며 완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1일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를 만난 자리에서 "AI 투자에서 금산분리 규제 완화를 검토해볼 수 있다"고 말하며 관련 논의가 본격화됐다. AI 산업은 수십, 수백조 원 단위의 초대형 장기투자가 필수적이다. 삼성·SK가 오픈AI의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에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를 공급하기 위해서는 현재 2배 수준의 반도체 생산라인 증설이 필요하고, 조원 단위의 외부 자금을 유치해야 한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최근 금산분리 완화에 대해 "(AI 투자를 감당할) 새로운 제도가 필요하다"고 언급한 것도 이 같은 이유다.

논의의 핵심은 지주회사를 묶고 있는 두 가지 규제를 풀어주는 것이다. 공정거래법상 지주회사의 손자회사의 증손회사 의무지분율(100%)을 50%로 낮추고, 지주회사 산하에 금융펀드를 굴릴 수 있는 GP 설립을 허용하는 방안이다. 현재는 대기업 등 산업자본이 금융회사를 소유하거나, 직접 펀드를 조성해 연기금 등 외부 큰손들로부터 조원 단위 투자를 유치하는 것이 막혀 있다. SK하이닉스 같은 지주회사의 손자회사들이 반도체 공장을 짓고 싶어도 외부 투자를 받을 길이 없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금산분리 규제로 국내 기업들은 AI 투자에 회사채 발행이나 유상증자 대출 등 전통적 자금 조달 방식이나 내부 유보금에만 의존해야 한다"면서 "이자 비용이 들지 않는 지분 투자 유치는 금산분리 규제에 가로막혀 있고, 채권 발행이나 대출 등은 막대한 이자비용을 감당해야 하고 재무제표상 부채로 잡혀 신산업에 대한 초대형 투자에 적합하지 않다"고 짚었다. AI 전쟁이 개별 기업의 이익을 넘어 국가의 핵심 생존 전략으로 떠오른 글로벌 현실을 고려할 때 시중자금이 첨단산업으로 흐르도록 AI에 한해 예외적으로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금산분리 규제가 공정거래법을 비롯해 은행법, 금융지주회사법, 금융산업 구조개선법 등 다수의 법률에 묶여있는 만큼 '특별법 제정' 방식으로 풀자는 제안도 나와 있다. 예외적 허용의 전례도 있다. 앞서 문재인 정부는 인터넷전문은행 설립 및 운영에 관한 특례법을 제정해 산업자본이 인터넷은행의 의결권 지분을 최대 34%까지 확보할 수 있도록 허용한 바 있다.

부처별 온도차에 물고 튼 논의 제동걸리나 

경제부처 수장들은 AI 등 전략산업 분야에 한해 예외적 허용 가능성을 시사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9일 "금산분리의 근본 정신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검토하겠다"며 가능성을 시사했고,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도 "총력을 다해 반도체 등 경쟁력을 만들어내는 (측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부 안팎에서는 AI 투자 확대를 이유로 규제 완화 공감대가 큰 만큼 공정위가 반대 입장을 끝까지 유지하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사금고화 등 도덕적 해이 문제는 감독과 규정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금산분리의 전향적 규제 완화가 아닌 현행법 체계를 크게 흔들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규제 완화안에 대한 논의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세종중부취재본부 세종=조유진 기자 tint@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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