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믿음기자
오늘날 정치 또는 정치인이란 말은 조롱과 비난, 격하와 경멸의 대명사가 됐다. 일상에서 누군가를 향해 '정치 좀 하지 마라'라고 충고할 때, 정치란 말 뒤에는 흔히 천박함과 옳지 않음을 뜻하는 접사 '~질'이 생략돼 있다. 정의에 관한 신념 없는 눈치와 야합, 사익을 공익으로 바꿔치는 둔갑술, 관용과 경청보다 소리치고 윽박지르는 오만과 독단, 합리적 설득 없이 탄압과 박해를 무기 삼는 독단을 생각하면 정치에 대한 환멸과 실망은 당연하게만 느껴진다.
작년 12월3일, 윤석열의 계엄령 선포와 쿠데타 시도, 그 실패 이후 측근 그룹이 보여준 파렴치한 뻔뻔함, 그 이후 민주 절차와 사법 질서에 관한 존중 없이 당리당략부터 우선하는 정당 행태 등은 우리의 정치 혐오를 부추긴다. 그러나 정치는 '정치 따위'가 아니다. 너무나 중요해 도무지 포기할 수조차 없다. 온 국민이 며칠 후 대통령 선거를 위해서 후보들의 말 한마디, 행태 하나, 정책 하나하나에 어쩔 수 없이 귀 기울이고 눈 돌리고 있지 않은가. 정치는 외면하고 싶을 때조차도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다. 더 나은 정치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정치적 능력은 타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정치를 옹호함'(후마니타스)에서 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정치학자 버나드 크릭은 말했다. 대화와 타협은 12·3쿠데타 시도 이후의 한국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정치적 능력이다. 이 쿠데타는 한국 정치의 깊은 곳에 잠재한 독재의 유혹, 즉 언제든 민주적 절차를 외면하고 나와 생각과 의견이 다른 타자들을 경멸하고 억압하며, 박해하고 탄압하는 데 언제든 물리적 폭력을 동원할 수 있음을 드러냈다.
크릭에 따르면, 통치에 폭력을 동원해 "조화를 일치"로 바꾸려는 이런 행위는 "위대하고 개명된 인간 행위"인 정치와 완전히 반대편에 있다. 정치는 사회 안에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전통을 가진 다양한 집단들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하며, "정치적 통치 방식은 다른 집단의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가능한 한 달래어 설득하는 것"이고, 그들에게 "안전을 제공하고,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의사 표현 수단을 충분히 보장하는 것"이다.
정치는 적절한 대화와 협상을 통해 적에 대한 존중을 통치의 효율적 실현과 결합하는 행위다. 사회 내 다양한 집단이 내뿜는 온갖 소음과 잡음을 화음으로 바꾸는 공동체의 연금술이다. 따라서 신념을 고집하는 독단주의자, 집단을 갈라치고 분란을 부추기는 교활한 분열주의자, 합리적 설득 대신 유언비어를 일삼고 불신을 퍼뜨리는 음모론자는 정치에 적합하지 않다.
크릭은 현대 정치의 커다란 두 적이 이데올로기적 이념과 기술주의적 관료제에 있다고 보았다. 이념은 정치를 이데올로기나 신념의 쟁투장으로 바꾸어 갈등을 증폭하고, 관료제는 정치를 숫자나 데이터 놀이로 치환해 한낱 행정적 효율성으로 전락시킨다. "정부의 모든 결정이 '과학적으로' 또는 명확하고 사전에 잘 준비된 기술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라고 믿는 건 어리석다. 사회적 합의를 거쳐서 정치는 경제학이나 과학이 제시하는 현재의 숫자를 넘어 언제든 공동체의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다.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한 시도야말로 정치의 주요 가치이다.
그러나 정치는 이상을 향한 집착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관계의 변화에 맞춘 실천의 기예이고, 살아 있는 생물처럼 변화무쌍한 행위다. "우리의 모든 개성과 다양성을 억지로 하나의 조직체로 통합하려 하면, 그 조직은 극도로 비정상적이고 자기 파괴적"으로 변한다. 정치는 이념의 완고한 실현, 비타협적 일관성, 고정적?추상적 목표의 반복 확인일 수 없다. 공동체 전체의 복리를 실현하고 안정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정치가는 얼마든 신념을 버리고 기꺼이 사과하며, 유연하게 말과 행동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크릭은 정치가가 "달래어 조정"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공동체에서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좋은 통치가 가능하고, "서로 다른 진실을 관용"하면서 "생존에 필요한 공동의 이해관계에서 가장 적절한 수준의 타협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다른 생각과 목표가 있는 사람들이 서로 각축하고 경쟁하면서 공통 목표를 이룩하는 일을 반복하는 경우에만 장기적으로 공동체에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난다. 잦은 대화와 타협은 "분열된 사회에서 과도한 폭력 없는 통치", "창의적이고, 유연하며, 즐겁고, 인간적인 정치"를 북돋운다.
이 때문에 크릭은 민주주의나 민족주의 자체를 교조적으로 추종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독일 나치는 절대다수의 지지를 악용해서 독일 국민을 히틀러 독재와 파시즘의 광기로 몰아넣었고, 민족주의는 자유로운 개인을 "스스로 민족의 일원으로 복속"시키고, "규율, 통일성, 충성심, 폭력 등"에 중독시키는 전체주의적 기제로 작용할 수 있는 까닭이다. "사람들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정부는 없으나, 모든 정부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 힘이 있다." 정치가 작동하지 않을 때, 민주주의도, 민족주의도 자칫 인간 억압의 수단으로 변질된다. 이는 보수주의, 자유주의도 마찬가지다. 전체 공동체의 복리를 위한 대화와 합의, 조정과 타협보다 이념이 앞서는 순간, 정치는 파멸하고 독재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크릭은 이야기한다. "진정으로 정치적인 정치가는, 정치적 권력이 존재하고 대표자들로 구성된 의회가 있는데도 실제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반대로) 정책에서 어느 정도 협상이 불가능한 것도 없음"을 알고 있다. 이는 자신이 이룩해야 하는 모든 정책이 "자유로운 의회에서 다소간의 변형과 개입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윤석열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어떻게 참혹한 패악으로 떨어졌는가를 생생히 보았다.
오늘날 한국 정치개혁의 핵심적 과제는 대화와 타협의 제도화, 즉 한 지도자의 권위주의적 결단만으로 폭력의 동원이 불가능한 체제의 실현, 대통령과 중앙정부에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의 분산과 해체에 달려 있다. 이번 대통령 선거가 크릭이 말하는 진짜 정치를 위한 출발점이다. 부디 신중하고 현명하게 선택해서 관용과 경청의 정치를 일상화함으로써 시민들이 다시는 촛불을 들지 않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장은수 출판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