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동 법조타운에 나타난 50대 인턴…일자리 새 모델 될 수 있을까[별별행정]

'서리풀 리걸 서포터즈' 김희숙·여인성씨
서초구 ‘중장년 법률사무 인턴십 취업 지원사업’
"중장년은 주요 인적자원" "월급만큼 중요한 게 존재감"

'서리풀 리걸 서포터즈' 사업을 통해 서초동 법조타운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는 김희숙씨(사진 좌측)와 여인성씨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인턴 업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서초구 제공.

열정적인 30세 여성 최고경영자 앤 해서웨이. 경험이 무기인 70세의 로버트 드 니로가 인턴으로 채용되며 벌어지는 일을 다룬 영화 ‘인턴’의 장면이 한국 사회에서는 불가능할까.

한국의 법정 정년은 60세지만 그 전에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이 더 많다. 중장년 조기 퇴직자 상당수는 탄탄한 경력과 경험을 자랑하지만 ‘나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재취업의 길은 험난하다.

다시 일하고 싶다. 그러나 단순노무직이나 용역업체 계약직 일자리는 성에 차지 않고, 그동안 걸어온 길과도 무관하다. 인력의 효율적인 활용 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고학력 은퇴 세대가 늘어나는 추세에서는 더욱 그렇다.

서울 서초구가 지난해부터 운영하기 시작한 ‘서리풀 리걸 서포터즈’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서초구는 지난해 ‘중장년 법률사무 인턴십 취업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서초구에는 대법원, 대검찰청, 법원·검찰, 변호사단체, 변호사·법무사 사무실 등 법조타운이 밀집해 있고, 관련 인력의 수요가 꾸준하다는 점에서 착안한 것이다.

서초구는 만 58세 미만 구민 중 지원자를 선발해 법률 사무분야 단기 전문교육을 거치도록 하고, 6개월간의 인턴십 기회를 준다. 서초50플러스센터가 전문기관에 위탁하는 단기 법률사무원 양성 교육을 수료한 50대는 서초동의 로펌 등에서 6개월간 인턴사원(3개월+3개월 연장)으로 일하다 채용 기회를 얻는 것이다.

다양한 법률기관의 인력수요에 비해 20대 직원은 이직률이 잦고 단순 사무업무에만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경험과 전문성이 풍부한 중장년 세대가 이곳에 재취업하면 ‘윈윈’이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다.

서리풀 리걸 서포터즈에는 지난해 12명의 중장년이 인턴에 참여했고, 최종적으로 4명이 취업에 성공했다. 올 상반기에도 교육 참여자 17명 중 우수자 10명을 선발했고, 이들은 지난 5월부터 이달 말까지 구와 업무협약을 맺은 파트너 기관인 법무법인 승평, IBS 법률사무소, 리앤승 법률사무소, 법률사무소 도원, 노무법인 도원, 법무법인 서울센트럴, 세인 법무사 사무소, 안암 법무사 사무소, 법무사 정명조 사무소 등 9개 회사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고 있다.

금융기관에서 마케팅·영업 관리 업무를 하다 3년 전 퇴직한 여인성씨(52·사진 우측)는 법무법인 승평에서 이미 ‘실장님’으로 불린다. 여씨는 “업무 특성상 액티브함과 꼼꼼함을 겸비해야 하는데 이제서야 성격에 맞는 일을 찾은 것 같다”면서 “가족과 주변 지인들도 잘 어울린다, 참 잘 선택했다고 얘기해주더라”고 말했다. 여씨는 사회 경험을 살려 사회 초년생 직원들이 소화하기 힘든 마케팅, 고객유치 등으로 업무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법무사 정명조 사무소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는 김희숙씨(58·사진 좌측)는 “제가 받는 것에 두 배 이상은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경험을 살려 업무에 적용하고 있고, 지금도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김씨는 “세무법인 사무장, 제약회사 세무회계담당 이사 등의 경력에, 빌딩관리회사를 운영한 경험을 업무에 녹여내고 싶다”며 존재감과 보람에 대해 강조했다.

허정훈 서초50플러스센터 팀장은 “중장년이 효과적인 인적자원이고, 그들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는 경험을 제공해야 중장년 채용이 전반적으로 늘어나는 사회적 효과를 가지고 올 것”이라며 “서초구는 이 프로젝트를 굉장히 중요한 세대 전환의 시작점에 있는 사업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여씨가 근무하는 서초동 법무법인 승평 사무실에서 이들을 만났다.

대기업과 금융기관에서 주로 근무한 여인성씨는 마케팅 등 업무경험을 살려 법률 분야에서 활동하고 싶다고 했다. 서초구 제공.

-직장 경력이 어떻게 되나요.

(여인성)”첫 직장 대한항공을 거쳐 은행과 보험, 증권회사에서 금융 관련 마케팅과 영업관리 업무를 했습니다. 3년 전에 퇴직하고 인공지능, 메타버스 관련 사업을 1년 정도 하다가 투자받는 데 어려움이 있어서 사업을 접었어요. 이후 공공기관에서 하는 신중년 사회 진출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다가 서초50플러스센터에서 서리풀 리걸 서포터즈에 대해 알게 됐어요. 법률 교육에 관심이 많았고, 법률 지식이 생기면 주변에 도움을 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김희숙)”경영학을 전공하고 세무사사무소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어요. 10년쯤 근무하다가 제약회사에 스카우트 돼 다시 10년 정도 일하며 세무회계 파트부서장까지 승진했어요. 미국으로 박사과정을 공부하러 가려다 사정이 생겨 포기하고, 빌딩관리회사에 재입사했습니다. 그러면서 연관된 회사를 창업해 운영하기도 했어요. 사업을 하며 송사에 휘말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법률 지식에 대한 지적 욕구가 생겼어요.”

-교육은 어땠나요.

(여)”전문기관에서 하는 법률사무원 양성과정을 하루 6시간씩 6회차 수강했어요. 법률 사무영역에 대한 기본 법률 지식과 전자소송 실습, 서면작성 실무 등 현장에서 많이 활용되는 법률사무 중심으로 배웠습니다. 교육 자체도 즐거웠지만 비슷한 또래와 상황인 분들과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게 좋았어요.”

-인턴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6개월 후에는요.

(여, 김)”처음에 3개월을 진행하고, 서로 조건이 맞으면 3개월 연장할 수 있어요. 저희는 지금 연장 과정에 있고 6개월 차(10월 기준)에요. 그렇게 6개월을 근무하면 회사에서 채용 의사가 있을 경우 정식 채용 여부에 대해 상호 협의합니다. 서로 조건과 요구가 맞으면 정식 근로계약을 맺게 돼요.”

-인턴 기간 급여는 어떻게 받습니까.

(여, 김)”인턴 기간 급여는 구청에서 지원해 줍니다.”

-인턴 기간에는 주로 어떤 일을 하시나요.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요.

(여)”법률사무소 직원들이 주로 하는 송무 관련 업무도 하지만 제가 그동안 사회생활을 하며 쌓은 네트워크를 활용해 법무법인을 알리고, 마케팅하는 쪽에 비중을 두려고 해요. 제가 행정업무를 담당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기존의 젊은 직원들과 업무가 겹치고 충돌이 생길 수 있잖아요. 기본적인 법률 지식을 가지고 마케팅하는 건 사회 경험이 풍부한 저와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김)”저는 부동산 등기업무를 주로 하는 법무사사무소에서 인턴을 하고 있어요. 찾아오는 고객들을 상담하고 일 처리도 하지만 저의 경우엔 틈날 때마다 개업 공인중개사사무소를 직접 찾아가 대화도 나누고 회사를 홍보하며 명함도 건네요. 클라이언트들과 연배도 비슷하고 사람을 대하거나 관계를 풀어나가는 데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차츰 성과가 날 거라고 생각해요. 사무실에 일찍 나와서 청소도 하고, 퇴근 후 남아서 공부도 해요. 저는 적극적인 스타일이고 일 욕심도 많아요. 멀티플레이어로서 제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곳을 찾고 싶어요.”

법무법인 승평 김형근 대표변호사가 기자에게 서리풀 리걸 서포터즈 파트너 기관으로 참여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서초구 제공.

여인성씨와 김희숙씨는 '존재감'에 대해 강조했다. 재취업에 나서는 중장년들이 보람과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일자리와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여러 지방자치단체는 물론 중앙정부에서도 서리풀 리걸 서포터즈와 같은 사업을 벤치마킹해 지역적 특색에 맞는 양질의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줬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서리풀 리걸 서포터즈 사업 첫해부터 파트너 기관으로 참여한 법무법인 승평 김형근 대표변호사는 “분야에 따라 난이도 있는 업무를 도와줄 직원이 필요할 때가 많다”면서 “중장년 인턴의 경력, 경험과 맞아떨어지고, 유연한 태도와 소통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면 충분한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했다.

지자체팀 김민진 기자 enter@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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