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권해영특파원
세계의 화약고로 불리는 중동 정세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지난해 10월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이후, 이란과 이란이 지지하는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까지 분쟁에 가세하며 이 같은 국지전이 5차 중동전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특히 최근에는 이스라엘 군이 레바논 베이루트를 공습해, 헤즈볼라 최고 지도자인 하산 나스랄라를 제거하는 등 이스라엘과 중동 반(反) 이스라엘 진영 간의 분쟁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특이한 점은 이 같은 극단적 긴장 속에서 국제유가는 오히려 하락,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9월 말 배럴당 93달러 정도였던 중동산 두바이유는 올해 9월 말 73달러 수준으로 전년 동기 대비 20% 넘게 하락했다. 최근 1년새 최저 가격이다. 미국 석유 가격의 근간이 되는 서부텍사스산원유(WTI) 또한 같은 기간 91달러 수준에서 68달러 가량으로 떨어졌다. 중동 불안 고조가 유가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최근 50여년간의 '유가 공식'이 이번만큼은 적용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예전과 달리 국제유가가 안정세를 띄는 이유는 여럿이다. 우선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경기 침체 전망에 따른 원유 수요 감소 우려가 꼽힌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지난 18일(현지시간)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인하하는 '빅컷'을 단행하며 일각에서는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대부분 전문가들이 9월 금리 인하폭을 0.25%포인트로 전망했다는 점에서, 예상 밖의 과감한 금리 인하는 고용시장 급속 냉각을 비롯한 침체 우려가 커지고 있다는 신호를 의미할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중국의 부동산 경기 냉각과 이른바 '공동부유' 정책에 따른 성장 산업 옥죄기도 불황 우려를 부추긴다. 중국의 제조업 경기를 가늠할 수 있는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8월까지 넉 달째 경기 위축을 가리키고, 중국 인민은행은 최근 지급준비율을 0.5%포인트 낮추며 내수 진작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 같은 미·중 경기 침체 우려가 원유 수요 감소 전망으로 이어지는 모습이다.
미국이 셰일오일 채굴 등으로 석유 생산량을 늘린 것도 국제유가 안정세에 기여했다. 미국에너지정보청(EIA)은 미국의 하루 평균 원유 생산량이 지난해 1292만 배럴을 기록한 데 이어 올해 1321만 배럴, 내년 1344만 배럴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미국은 지난해 전 세계 석유 공급 증가량의 80% 가량을 차지했다. 중동 정세 불안에 따른 글로벌 원유 공급망 불안을 미국이 폭발적인 원유 공급으로 억누르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이 낮은 유가는 오는 11월 열리는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쪽에 유리하게 작용할 전망이다. 현 경제 상황이 어려울수록 야당에, 좋을수록 집권 여당에 유리하다는 건 선거의 일반적 공식이다. 미국은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데다 국토가 넓어 자동차를 이용한 이동이 필수다. 미국인들이 기름값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다. 이달 초 미국 노동절 연휴기간 동안 CNN을 비롯한 친(親) 민주당 성향 언론은 1년새 낮아진 휘발유 가격 덕분에 연휴기간 여행객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며 민주당을 간접 지원하기도 했다.
월가에서는 유가가 향후 70달러 내외에서 유지될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시티그룹은 내년 60달러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내놨다. 유가가 배럴당 50달러를 넘어야 셰일오일 채굴 기업이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인 만큼, 미국 입장에선 70달러 선에서 원유 가격을 유지하는 게 원유 수급과 자국 석유 산업 발전 등에서 유리하게 작용한다.
지금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앞으로 한 달 가량 유가 급등을 바라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다만 중동 정세가 국제유가에 미치는 영향이 줄어들고 글로벌 원유 시장에서 미국의 파워가 커진 만큼, 유가 흐름만 놓고 보면 민주당 후보인 카밀라 해리스 부통령에게 유리한 국면이 최소 대선 전까지는 이어질 것 같다. 유가 추이만 놓고 보면 해리스의 승리에 베팅하는 것이 맞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