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연기자
수년째 줄다리기 중이던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을 놓고 MBK파트너스가 영풍 측 백기사로 참전하면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 영풍·MBK 연합과 고려아연 현 경영진 간의 분쟁에 지역사회, 정치권까지 가세해 싸움의 판이 커졌다. 고려아연 주요 주주인 현대차 LG 한화 등 재계 주요 그룹의 향후 대응과 국민연금, 소수 주주의 공개매수 참여 여부에도 관심이 쏠린다.
'쩐의 전쟁'에서는 영풍·MBK 연합이 유리한 고지에 있다. MBK파트너스와 영풍은 이달 13일부터 10월4일까지 고려아연 주식을 주당 66만원에 최소 144만5036주(6.98%)에서 최대 302만4881주(14.61%)까지 사들이는 공개매수를 진행하고 있다. 공개매수가 성공적으로 끝나면 영풍과 MBK 측 지분은 최대 47.7%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의결권이 없는 자사주 등을 제외하고 계산하면 지분율은 52%로 과반을 확보하게 된다. 여기에 필요한 돈은 최대 2조원에 달한다. MBK가 이번 공개매수에 활용하는 특수목적법인(SPC) 한국기업투자홀딩스는 6호 블라인드 펀드 기반이다. 펀드 규모가 8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주가 흐름에 따른 공개매수 가격 인상 등 추가 자금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계산 범위 내라면 자금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최윤범 회장 측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최소한 확보해야 할 고려아연 지분율은 6.05%, 약 8000억원 규모다. 이는 최 회장 측 지분 15.9%에 현대차, 한화, LG 화학 등 대기업 지분이 백기사 역할을 할 것이란 가정하에서다. 향후 상황이 바뀔 경우에는 경영권 방어를 위한 더 큰 자금이 요구된다. 최 회장이 대항공개매수에 나서는 경우를 가정하면 자금 확보에는 회의적인 시각이 짙다. MBK 측 고위관계자는 "공개매수는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구별하는 절차가 아니라 투자수익을 고려할 때 지금 공개매수에 응하는 것이 나을지 그냥 가지고 있는 것이 나을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쩐의 전쟁' 못지않게 명분 싸움도 치열하다. 박기덕 고려아연 사장은 18일 영풍·MBK 측의 공개매수에 반대 의사를 공식 표명했다. 고려아연은 그간 영풍이 환경법과 중대재해처벌법을 위반해왔고, 대규모 적자로 경영 능력도 인정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영풍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방기한 채 '약탈적 자본'과 결탁해 고려아연의 지분과 경영권 확보에만 몰두해 왔다는 주장이다. MBK파트너스와 같은 사모펀드가 고려아연의 경영권을 취득할 경우 이차전지 소재 등 핵심 전략 사업에 차질을 빚을 뿐 아니라 주주가치가 훼손될 우려도 크다고 강조했다. 박 대표는 "이번 공개매수 시도는 국가 기간산업인 비철금속 분야 세계시장 점유율 1위의 경쟁력을 보유한 당사에 대한 기업사냥꾼의 적대적, 약탈적 M&A라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MBK파트너스에 대해 "그동안 여러 차례 국내에서 시장 경쟁력 있는 회사를 인수한 다음 핵심 자산을 매각하거나 과도한 배당금 수령 등을 통해 투자금 회수에만 몰두하는 등 약탈적 경영을 일삼아왔다"고 주장했다. 또 "MBK파트너스는 영풍 및 그 특수관계인들의 지분에 대하여 콜옵션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바, 약탈적 자본과 결탁한 공개 매수자들이 당사 경영권을 인수한 다음 당사의 경영권을 해외 자본에 재매각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언급했다. 대주주인 영풍에 대해서도 "그동안 석포제련소를 운영해 오면서 각종 환경오염 피해를 일으켜 지역 주민들과 낙동강 수계에 막대한 피해를 입혀왔다"고 비판했다. 박 대표는 "이번 공개매수는 당사의 중장기적인 기업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소액주주를 포함한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을 심각하게 훼손할 우려가 크다는 것이 당사의 결론"이라며 "이번 사태 해결을 위해 철저히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날 MBK도 입장문을 통해 주식 공개 매수는 현재 최대주주인 영풍 측의 경영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적대적인 행위, 경영권 탈취와는 관계가 없다고 밝혔다. MBK는 "공개매수는 명백한 최대주주, 1대 주주의 경영권 강화 차원이며 장씨와 최씨 일가의 지분 격차만을 보더라도 일각에서 주장하는 적대적 M&A는 어불성설(語不成說)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MBK에 따르면 20여년간 두 가문의 지분은 15%포인트 이상 차이가 났다. 지분 격차는 2002년 31.73%포인트까지 벌어졌고 2022년 이후 최소 격차 16.75%포인트로 줄었으나 최근 다시 영풍과 장씨 일가 측 지분이 늘어나며 격차를 벌리는 중이다. 현재 영풍과 장씨 일가의 고려아연 지분율은 33.1%로 최씨 일가(15.6%)에 비해 2배 이상 많은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고 MBK는 설명했다. MBK는 고려아연이 영풍그룹의 계열사라는 사실도 강조했다. MBK는 "영풍과 고려아연은 공정거래법상 장형진 고문을 총수로 하는 대규모기업집단 영풍그룹의 계열사들"이라며 "최 회장 측이 주장하는 계열 분리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사안"이라고 단언했다. MBK는 현대차, 한화, LG 등 대기업들의 고려아연 지분도 최 회장의 우호 지분이 아니라면서 "우호 지분이라면 최 회장과 의결권을 공동으로 행사하는 등 공동행위 주요 주주로 공시했어야 하지만 해당 기업들은 비즈니스 파트너십에 대해서만 공시했을 뿐, 공동행위자임을 밝힌 바가 없다는 게 그 근거"라고 설명했다. 가장 큰 변수는 고려아연 현 경영진의 법률적 리스크 발생 여부다. 영풍은 최 회장에 대해 원아시아파트너스 투자 배임 의혹과 SM엔터테인먼트 시세조종 관여 의혹, 이그니오 고가매수 의혹 등을 제기하며 법원에 회계장부 열람·등사 가처분을 신청한 상태다.
추석 연휴 기간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은 자본시장 논리와 산업적 이해관계를 넘어 지역사회 및 정치권으로 확산했다. 생산 시설이 있는 울산 지역 정치인들은 적극적으로 고려아연 지지에 나섰다. 김두겸 울산시장은 18일 기자회견을 열어 “MBK로 경영권이 넘어갈 경우 고려아연이 중국계 기업에 팔리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다”며 “사모펀드의 주된 목표가 단기간 내 높은 수익률 달성임을 고려하면 인수 후 연구개발(R&D) 투자 축소와 핵심 인력 유출, 해외 매각 등이 시도될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김 시장은 ‘고려아연 주식 사주기 운동’도 제안했다. 그는 “울산시민은 20여년 전 SK가 외국계 헤지펀드와 경영권 분쟁을 벌일 때 ‘SK 주식 1주 갖기 운동’을 펼쳐 막아낸 바 있다”며 “이번에도 ‘고려아연 주식 사주기 운동’ 참여로 120만명의 울산시민의 힘을 보여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 시장은 “정부·국회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면서 효과적인 대응책 마련에 나서고, 필요하다면 대통령실에도 직접 건의할 계획”이라고 언급했다. 전날 박희승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보도자료를 내고 "MBK의 고려아연에 대한 적대적 M&A 시도에 강한 우려를 표한다"며 "국감에서 MBK 위탁운용사 선정 과정에 대한 논란을 따져 물을 것"이라 밝혔다. 박 의원은 "고려아연은 대한민국의 기간산업이자 전략산업으로 산업의 쌀이라고 불리는 아연을 비롯해 각종 산업의 기초가 되는 소재를 만들고 있다"며 "중국 의존도가 큰 이차전지 분야에서 현대차, LG, 한화 등과 손잡고 탈 중국 밸류체인의 중심에 있는 기업이자 울산에서 50년 전 설립돼 지속적으로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도 늘려가고 있는 지역경제의 핵심기업"이라고 말했다. 그는 "MBK가 중국계 자본을 등에 업고 고려아연에 대한 적대적 M&A를 시도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며 "자칫 중국 자본과 관련 기업들이 고려아연을 인수할 경우 독보적인 기술은 해외로 유출되고 핵심 인력들의 이탈도 가속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 고려아연 최대 주주인 MBK·영풍 측은 반박했다. 이들은 "MBK는 2005년에 설립돼 국내 금융당국의 감독을 받는 ‘국내 사모펀드’이며, 중국계 펀드가 아니다"며 "MBK 펀드에 출자하는 유한책임투자자(LP)들은 국내 및 세계 유수의 연기금들과 금융기관들이며, 중국계 자본이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국가기간산업 경쟁력 훼손 우려에 대해서도 해명하면서 직원 고용을 종전과 같이 유지하고, 고려아연이 울산기업으로서 재도약하는 것을 돕겠다고 밝혔다. MBK·영풍 측은 19일 오전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이번 공개 매수 배경과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한편 영풍그룹의 계열사 고려아연은 공동 창업주 고 장병호·최기호 회장의 후손들이 운영했다. 장씨 일가는 영풍문고와 전자계열사를, 최씨 일가는 고려아연을 포함한 비철 분야 계열사를 경영하고 있다. 2022년 창업주 3세 최 회장 주도로 유상증자 등을 진행하며 지분 관련 분쟁이 시작됐고, 영풍이 지난 2월 주주총회 안건에 반대를 표명하며 갈등이 본격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