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경기자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이 요양급여 심사 및 평가, 수가 등을 결정하는 진료심사평가위원회 상근심사위원으로 최근까지 정부의 의과대학 정원 확대 정책을 이끌어온 보건복지부 1급 관료를 영입한다. 국민이 낸 건강보험료로 운영되는 심평원이 의·약학 분야에서 전문적인 판단을 내려야 하는 자리에 비전문가인 퇴직 공직자를 앉히며 연봉 1억원짜리 재취업 창구를 자처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전병왕 전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이 지난해 11월21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전국 40개 의과대학의 입학정원 증원 수요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조용준 기자 jun21@
20일 복지부와 의료계에 따르면, 심평원은 지난달 말 전병왕 전 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에게 상근심사위원 채용 합격을 통보했다. 이에 따라 전 전 실장은 심평원에 이달 초 임용 관련 서류를 제출하고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에 취업 심사를 신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용 예정일은 다음 달 1일이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행시 28회로 입직한 전 전 실장은 복지부에서 보건의료정책과장, 장애인정책국장, 의료보장심의관, 사회복지정책실장 등을 거쳤다. 문재인 정부 시절 청와대 보건복지비서관실 선임행정관을 맡았다. 지난해 10월부턴 보건의료정책실장을 맡아 의대 증원 정책을 담당했다. 올해 2월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이 확정된 후 전공의들이 반발하며 의료 현장을 떠나자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제1통제관을 맡아 불법적인 집단 진료 거부에 엄정 대응하겠다고 선언하는 등 관련 정책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는 지난 6월 말 명예퇴직을 신청하고 그 때 공고가 난 심평원 상근심사위원 채용에 지원했다. 그러자 고위공직자의 산하기관 직행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의료계 관계자는 "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차관 승진을 바라보는 자리인데 갑작스레 퇴직을 결정한 이유를 두고 의료 사태 책임을 피하려 하는 것 아니냐는 뒷말이 있었다"며 "그만큼 영향력이 큰 인물이니 심평원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모셔가는 것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강원 원주시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본원 전경.[사진제공=건강보험심사평가원]
심평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는 '국민건강보험법'에 의거해 요양급여비용 심사 및 요양급여 적정성 평가 업무를 수행하는 법정위원회다. 심사 및 평가 업무를 공정하고 전문성 있게 수행하기 위해 위원장을 포함한 90명 이내의 상근심사위원을 둘 수 있다. 대부분 의사, 치과의사, 약사, 한의사 등 현직 의료인들로 구성된다.
상근심사위원은 요양급여비용을 직접 심사하고 적정성을 평가하는 동시에 급여기준·심사지침 등을 개선·개발하고 임상 현장과의 적정진료 연계 시 전문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주된 업무다. 각종 위원회에서 행위·약제·치료재료 관련 정책을 지원하고, 해당 분야 직원들을 대상으로 전문 의학 교육도 한다. 이 때문에 임상 실무 경험 및 관련 노하우는 물론 각종 제도 운영 효과를 다면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능력 등이 요구된다. 행정관료가 전문성을 발휘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영역이다.
임기는 2년이며 전임(주 5일) 또는 겸임(주 16시간 이상)으로 근무할 수 있다. 전임 상근심사위원의 경우 보수는 1억원(기본연봉+성과연봉)을 웃돈다. 진료심사평가위원회의 상근심사위원 수는 2016년까지만 해도 50명 이내였으나 심평원은 늘어나는 분석 심사 업무에 대응하고 평가의 전문성을 강화한다며 법 개정을 통해 채용 가능한 숫자를 2배 가까이 늘렸다.
특히 심평원은 기관 위상을 높이고 대외협력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정관계 인사 영입에도 공을 들였다. 전 전 실장 이전에도 2020년 9월 명예퇴직한 노홍인 전 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이 2021~2023년 심평원 상근심사위원으로 근무한 것이 동일한 사례다. 심평원 내부 관계자는 "노 전 위원도 통상적인 심사 업무보다는 자문 형식으로, (상근 임에도) 주 3일 정도 근무했던 것으로 안다"며 "당시에도 복지부 출신의 낙하산 임명 논란이 있었으나 그 역할이 큰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어서 반대 목소리가 크지는 않았다"고 귀띔했다.
노 전 위원 역시 퇴직 후 3년 안에 재취업한 경우라 공직자윤리위의 퇴직공직자 취업심사를 거쳤는데, '공직자윤리법 시행령' 제34조 제3항 1호, 9호에 해당한다고 인정돼 '취업승인'을 받았다. 이 규정에 의하면 국가안보상의 이유나 국가 대외경쟁력 강화와 공공이익을 위해 취업이 필요한 경우, 관련 자격증·근무경력 등으로 전문성이 증명되는 경우 취업이 허용된다. 비슷한 이력을 가진 전 전 실장도 같은 예외 사유로 취업승인 판정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복지부 퇴직 관료가 심평원에 곧바로 재취업하는 일이 반복될 경우 심평원의 경영 효율성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은 물론 향후 이 같은 관행이 굳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국민 건강에 기여하고 수준 높은 의료환경을 만들겠다는 심평원의 주요 조직이라면 산업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혁신적인 의사 결정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의례적으로 전직 공직자가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그들만의 리그가 되는 건 뻔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또 "누구보다 전문성이 있어야 하는 심평원이 상급기관 출신 비전문가를 영입하는 것은, 스스로 우리 의료산업 발전을 발목 잡고 국민 건강을 위협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