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슬기기자
"을지로 골목이 '힙지로'(힙한 을지로)로 불리기 시작한 2017년 이곳에는 공방을 만들어 취미생활을 하면서 한켠에서는 커피를 내리는 식의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을지로 골목에 가게 2곳을 운영하는 최희식(41) 루엘 드 샹들리에 대표는 20일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2017년 을지로에 처음 가게 문을 열었던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회상했다. 인쇄소 공장이 돌아가는 골목의 한복판엔 그렇게 시작한 간판 없는 가게들이 많았다.
최 대표는 '힙지로'를 개척한 첫 자영업 세대다. 다만 노포가 있었던 만큼 2017년 전후 들어온 자영업자들끼리는 스스로를 1.5세대라 칭한다. 그는 "을지로 3~4층 사무실엔 공방, 화방이 많았는데 직장인들이 취미생활을 위해 얻은 공간들이었다"며 "옹기종기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작업 공간 옆에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났고, 하기 쉬운 음식을 만들어 저렴한 가격에 팔다 보니 독특한 분위기를 갖는 가게들로 발전하게 된 것"이라고 전했다.
최 대표는 2018년 을지로에서 와인바 '희스토리 다락방 우희'를 열었다. 당시 가게는 간판도 제대로 달려 있지 않아 나만 아는 공간이 주는 특별함으로 개성 강한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발길을 붙잡았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알려지지 않은 가게였지만 입소문만으로 하루에 30~40팀의 대기손님이 있을 정도로 문전성시였다. 이후 2019년 골목 안쪽에 있는 샹들리에라는 뜻을 가진 카페 '루엘 드 샹들리에'도 오픈했다.
'루엘 드 샹들리에' 역시 지역사회와 협업하는 공간이 되는 것을 목표로 만들었다. 최 대표는 "문화예술인들을 발굴하고 그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며 "화가로 등단하려면 작품 전시 이력이 필요한데 돈 없는 예술인은 전시할 곳 찾기가 어렵다. 예술인들에게 전시할 공간을 내주면 손님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으니 상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코로나19를 거치며 을지로 골목의 상권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했다. 과거에는 간판 없는 가게, 점주의 취향이 느껴지는 독특한 인테리어, 입소문만으로 유명해진 가게들이 많았던 것이 특징이었는데, 지금은 1층 목 좋은 자리, SNS 광고를 뿌리는 상업적인 가게들이 우후죽순 들어왔다는 것이다.
힙지로의 발판이 됐던 저렴한 임대료도 옛말이 됐다. 임대료는 물론 바닥권리금도 크게 높아졌다. 최근 을지로 골목에 들어온 한 세입자는 19평 공간을 얻으면서 기존 세입자에게 이사비 명목으로 2억원이 넘는 바닥권리금을 지불했다. 최 대표는 "그렇게 비싼 돈을 주고 오면 새 점주는 본전 생각을 해야 하니 음식값을 높게 받고 그러면서 동네가 비싸진다"며 "'내 것' 없이 광고로만 장사하려는 상권이 아쉽다"고 말했다.
돈 냄새 잘 맡는 전문 '꾼'들의 가게들로 힙지로가 채워질수록 입소문으로 먹고 살았던 가게들의 입지는 좁아졌다. 최 대표는 "부랴부랴 간판도 가져다 놓고 했지만 수백, 수천만원짜리 광고로 물량 공세 하는 집, 1층 목 좋은 자리에 화려한 인테리어로 무장한 가게들과는 경쟁이 안 된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내 것'이라는 자존심을 놓지 않기 위해서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며 "원래 시그니처 메뉴가 돈가스 튀김 샌드위치인데, 이제는 백숙도 판다. 좋아하는 것을 계속 시도하는 것이 내 자존심"이라고 설명했다. 을지로라는 공간에 대한 애정도 표현했다. 최 대표는 "'사장 50% 할인' 서비스가 있어 출근 전 커피 한 잔씩 하려는 동네 사장님들이 자주 오신다"며 "생업에 충실하신 분들이 골목 안에서 편하게 찾는 곳, 늘 그 자리에 있는 가게가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