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민기자
고든 무어(Gordon Moore, 1929년 1월 3일 ~ 2023년 3월 24일). 미국 반도체 업체인 인텔 창업자. 전 세계 반도체 역사에서 빛나는 이름 중 단연 손꼽히는 이다. 그가 지난주 94세를 일기로 이승의 실리콘 세계와 작별을 고했다.
무어는 "반도체는 2년마다 집적도가 배로 늘어난다"는 무어의 법칙의 주인공이다. 그가 남긴 이 한마디는 후학들에게는 '주홍글씨'다. 지키자니 어렵고 포기하기에는 아쉽다.
무어는 자타가 공인하는 반도체의 역사다. 반도체를 만든 윌리엄 쇼클리 밑에서 일하다 '8인의 배신자'와 함께 페어차일드반도체를 탄생시켰고 로버트 노이스(Robert Noice)와 독립해 인텔을 세웠다. 노이스가 1대, 무어가 2대 인텔 최고경영자였다. 두 사람은 훗날 인텔 3대 CEO가 되는 앤디 그로브를 채용해 진정한 반도체 집적회로 시대를 열었다. 집적회로(IC)는 텍사스인스트루먼트 출신의 잭 킬비(Jack Killby)가 개발했지만, 꽃은 인텔이 피웠다. 일본에 밀린 D램 사업을 과감히 포기하기로 결정한 것도 무어와 그로브다.
지금도 인텔을 필두로 여러 반도체 기업이 무어의 법칙을 이어가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인텔, 삼성, TSMC는 무어의 예견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 중이다. 반면 엔비디아는 무어의 법칙 종말을 선언했다. 애플은 공정의 개선을 바라보며 더 높은 성능의 반도체 설계를 내놓으려 한다. 이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며 반도체 생태계는 더 높은 성능과 낮은 전력 소비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지난해 9월 미국 반도체법(Chips Act)이 법제화된 직후, 한창 미국의 반도체 생산 리쇼어링에 대한 기대감이 클 때다. 리쇼어링의 선봉에 선 겔싱어는 "무어의 법칙이 아주 잘 살아 있다(alive and well)"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단일 패키지에 약 1000억개의 트랜지스터를 집적시킬 것이고 10년이 지나면 1조개의 트랜지스터를 집적시킬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반도체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선폭의 회로를 집적하기 위한 경쟁이다. 그러면서 전력 소비는 줄여야 하는 과제가 더 생겼다. 무어의 법칙이 끝났다는 주장이 이어졌지만 2021년 인텔의 구원타자로 투입된 펫 겔싱어 CEO는 2년마다 집적도가 2배 이상으로 늘어난다는 '슈퍼 무어'의 법칙을 꺼내 들었다. 향후 10년간 무어의 법칙이 유지될 것임도 자신했다. 겔싱어는 브라이언 크르자니크 전 인텔 CEO가 2015년 무어의 법칙이 둔화했다고 공언한 것도 부인했다. 자신이 무어의 법칙의 적자임을 내세운 것이다. 겔싱어도 자신 앞에 놓인 길이 어렵다는 걸 잘 안다. 그래도 해야 한다. 그의 성과에 인텔과 '메이드 인 아메리카' 반도체의 미래가 달렸다.
겔싱어가 무어의 죽음에 대해 올린 글도 결기를 보여준다. 겔싱어는 "무어는 우리가 했던 것을 더 잘 할 수 있다(What can be done, can be outdone)고 말했다. 무어의 법칙을 물려받은 인텔은 무어와 로버트 노이스가 시작한 일을 더 잘 해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다."
그러나 현실은 험준하다. 무어의 법칙은 종합반도체 업체와 파운드리 반도체 업체의 숙제다. 미세 나노 공정 발전 속도가 지연됐다. 무어의 법칙 준수를 위해 필수 조건인 노광기 발전 지연이 결정적이었다. 미세한 회로 기판을 그려줄 노광기 장비가 없다 보니 어느 반도체 업체도 치고 나가지 못했다. 이 벽을 깨준 주인공이 네덜란드 ASML이다. ASML은 인텔의 기술 및 자금 지원으로 극자외선(EUV) 장비를 만들었지만 정작 인텔은 TSMC와 삼성전자에 선수를 뺏겼다. 삼성과 TSMC가 3나노 경쟁을 벌이는 사이에 인텔이 아직도 10나노 공정에서 머무는 이유다.
어쨌거나 무어의 법칙을 지키기 위한 싸움은 인텔, 삼성전자, TSMC 간 경쟁이다. 더 참전할 수 있는 선수도 없다. 그런데 묘한 흐름이 벌어진다.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나온다. 엔비디아다. '검정 가죽점퍼의 사나이'가 운영하는 기업, 현재 세계 반도체 업계 시가총액 1위 기업이다. 이런 엔비디아가 보는 무어의 법칙은 다르다. 시가총액이 인텔의 4배까지 치솟은 엔비디아는 자신감이 넘친다. 반도체 아메리카의 겔싱어 CEO가 무어의 법칙을 수성하는 입장이라면 젠슨 황(Jensen Hwang) 엔비디아 CEO는 무어의 법칙 사망론자다. 직접 반도체를 생산하는 인텔은 된다고 하고 외부에 생산을 위탁하는 팹리스(Fabless) 엔비디아는 다른 말을 한다. 누구 말이 맞는 걸까.
인텔의 노력이 주로 하드웨어적인 면이라면 엔비디아는 다르다. 엔비디아는 무어의 법칙이 이미 사망했고 자신들이 소프트웨어적으로 이을 수 있다는 주장을 편다
무어의 사망 며칠 전인 지난달 21일 열린 엔비디아 'GTC2023' 행사. 이 행사에서 황은 월가 애널리스트들과의 컨퍼런스 콜에서 이렇게 말했다. "범용 CPU를 통한 무어의 법칙은 끝났다." 그는 엔비디아가 설계한 GPU가 생성형 AI와 클라우드 시대의 미래를 책임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엔비디아의 칩을 사용한 챗GPT가 AI혁명을 쏘아 올렸듯이 향후 반도체 발전도 자신들이 주도할 것이라는 자신감이다.
심지어 엔비디아는 자신의 GPU를 생산하는 TSMC의 손을 잡았다. EUV 노광기 독점 업체인 ASML를 비롯해 전자설계자동화(EDA) 선두업체인 시놉시스와 협업해 반도체 노광 공정에 가속 컴퓨팅 기술을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특히 엔비디아가 선보인 소프트웨어 '쿠리소(cuLitho)’가 화제다. 반도체 노광 속도를 높여주는 소프트웨어다. CPU가 아니라 GPU를 통해 집적회로를 그려 2나노 공정에서 앞서나가겠다는 선언이었다.
황 CEO는 "쿠리소가 최첨단 공정인 2나노 이하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무어의 업적에 대해 언급한 또 한명이 있다. 팀 쿡 애플 CEO다. 쿡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은 고든 무어라는 거목을 잃었다. 무어는 실리콘 밸리를 세운 아버지(founding father) 중 한명이며, 기술 혁명의 길을 열기 위한 진정한 선지자(true visionary)였다. 지금 뒤따르는 우리들은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
많은 실리콘밸리 스타들이 무어를 기억했지만, 쿡의 발언은 남다르다. 지금 애플은 과거의 애플이 아니다. 이미 애플은 인텔, AMD, 퀄컴을 위협하는, 아니 이미 추월했을 수도 있다. 애플 실리콘에 밀려난 인텔의 사례는 현대 반도체의 중심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보여준다. 젠슨 황의 자신감도 그렇다. 팹리스 반도체 업체 애플의 위상을 고려하면 쿡의 발언에서는 애플이 무어의 법칙을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이미 파트너도 있다. TSMC다.
모리스 창 TSMC 창업자는 "이제 1세대 반도체 동료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어쩌면 창은 자신이 살아 있는 한 TSMC의 반도체 주도권 유지가 계속될 것임을 자신한 것 아닐까. TSMC와 애플, 엔비디아의 전진 속에 무어의 법칙이 '황의 법칙', '쿡의 법칙', '창의 법칙'으로 바뀌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