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미래]'매력도시 서울, 과거 켜켜이 쌓아둬야'

'서울 문학 기행' 저자 방민호 서울대 교수
현진건·나도향·박완서의 '문학공간' 아파트숲에 묻혀
일제강점기 문인·예술가 기억할 수 있는 공간 있어야

[아시아경제 김종화 기자] "매력적인 도시 서울은 과거를 얼마나 켜켜이 쌓아둘 수 있는가에 달렸다."

방민호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과거, 현재와 미래의 공존을 얼마나 섬세하게 기획하느냐에 따라 서울의 미래는 달라질 것"이라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과거의 기억들을 재구성·복구·보존해서 과거, 현재와 미래가 몽타주 된 공간이 돼야 한다"면서 "병치(竝置)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서울의 미래는 확연히 달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영화에서 따로따로 촬영한 화면을 적절하게 떼어 붙여서 하나의 새로운 장면을 만들고, 범죄 수사에서 사람의 얼굴 각 부분을 따로 합쳐 어떤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기법이 '몽타주(montage)'다. 두 가지 이상의 것을 한곳에 나란히 두거나 설치한다는 뜻의 병치와 몽타주를 활용하면 서울의 미래를 새롭게 그려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일제강점기 문학에 대한 재평가와 당시 문인·예술가들의 행적을 후손들이 기억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도 했다.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은 정치·경제·군사적 지배를 받았지만, 인간 삶의 원천인 창조성과 능동성은 더 풍성하게 발휘했다. 특히 문학·예술 분야에서 발군이었다. 방 교수는 "지금 이상과 현진건, 박완서 등 한 시대를 풍미한 문인·예술가들을 기억하는 방식은 소홀하고, 성의가 없다"면서 "역사·문화적 공간들을 발굴해서 문화재나 사적지로 지정하는 것은 물론 일제강점기에 고투했던 많은 문인·예술가들의 노력을 기억하고, 기념할 수 있는 공간 조성도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방 교수는 박완서 '나목'의 주인공 이경이 사랑을 갈구했던 '수도극장'의 후신인 아시아미디어타워의 모습이 궁금하다면서 지난 7일 아시아경제를 직접 찾았다. 다음은 방 교수와의 일문일답.

-서울은 역사적·문화적으로 어떤 공간적 의미가 있나.

▲서울은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경험을 축적하고 있는 공간이다. 한국의 역사적·문화적 전통과 순환을 함께 함축하고 있는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현대에 들어서면 6·25전쟁 이후 서울은 월남민과 상경민, 원래 서울 토박이들 이렇게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한국인들의 집합 공간이 된다. 정치·경제·사회 모든 부문이 서울에 집중돼 왔기 때문에 서울은 한국인의 모든 것이 함께 소용돌이치는 회오리와 같은 공간이었다. 서울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평온한 날이 없었던 것 같다.

-가장 인상 깊었던 서울의 공간은 어디인가.

▲서촌에서 자하문터널을 지나서 세검정으로 연결되는 그 지역을 매우 좋아한다. 통인동에 시인 이상이 어렸을 적에 성장했던 곳이 있고, 자하문터널을 지나가면 이광수가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지낸 홍지동 산장이 있다. 그 산장을 나와서 이광수는 노골적인 대일 협력의 길을 걷게 된다. 또 부암동에는 현진건의 고택 표석이 남아 있고, 그 인근에 안평대군의 무계정사지 터 등 역사의 숨결을 잘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곳이다.

홍지동 이광수 산장. [사진=방민호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제공]

-가장 안타깝고, 애처로운 서울의 공간은 어디인가.

▲현진건은 동아일보 재직 때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고택에 거주하면서 양계를 했다. 동아일보 복귀 후 '무영탑', '흑치상지' 이런 이야기들을 썼던 곳이다. 한국 단편소설의 개척자인 현진건의 고택에 표석만 남아 있는 게 좀 서글프다. 주변에 있던 '탕춘대'의 흔적도 사라졌다. 연산군이 재위 마지막 해에 지어서, 해마다 와서 봄을 탕진하겠다고 했는데 지은 후 처음 찾은 것이 마지막이었다. 인생과 역사를 느끼기에 아주 좋은 공간인데 안타깝다. 박완서의 문학 공간이라고 할만한 독립문 인근 현저동 집도 아파트촌으로 변했고, '벙어리 삼룡이'를 썼던 나도향의 고향인 용산구 청파동의 연화봉(소설 속 무대)도 모두 아파트 숲에 묻혔더라. 급격한 도시화가 이런 역사적인 문화공간의 상실을 가져왔다. 그런 역사적 기억을 충분히 기록하거나, 담아두지 못한 그런 면에서 안타까운 점들이 많다.

-서울을 가장 차갑게, 반대로 따뜻하게 바라본 문인은 누구인가.

▲개성 인근이 고향인 박완서는 어린 시절 어머니, 오빠와 함께 서울 인왕산 밑 산동네 현저동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박완서에게 서울은 상처의 공간이었다. 교사였지만 의용군에 끌려갔다가 국군의 오발 사고로 부상을 당한 오빠의 죽음, 1950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자마자 일어난 전쟁과 처절한 생존을 위한 시간들, 서울은 박완서에게 상처와 애증의 공간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서울을 바라보는 박완서의 시각이 나름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다. 반면, '목마와 숙녀'의 박인환은 명동을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이다. 폐허가 된 명동에서도 늘 술을 마시고, 시를 논하고, 시를 읊는, 정말 서울을 사랑한 시인이었다. 박완서의 '나목'에 나오는 명동은 파괴된, 그러면서 생존을 이어가는, 사랑을 갈구하는 곳으로 그려진다. 박인환에게는 폐허가 됐음에도 삶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과 대비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방민호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7일 서울 중구 아시아미디어타워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 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공간들에 대한 서울 시민의 관심이 부족하지 않나.

▲'서울문학기행'에서 현진건의 고택이 있는 부암동과 나도향의 고향 청파동을 다루지 못해 늘 아쉬웠다. 자하문터널을 지나 홍지동 이광수 별장, 종로 누상동 9번지 윤동주 하숙집, 소공동 미스코시 백화점(신세계 백화점)의 이상, 박태원이 '소설 구보 씨의 일일'에서 도회의 항구라고 표현했던 '경성역(서울역)', 김수영의 집터, 손창섭의 흑석동 언덕배기, 계동 이경의 집(박완서 '나목'), 이호철의 '서울은 만원이다'에서 문제적 거리였던 종로3가, 임화의 종로 네거리, 박인환의 명동 동방살롱(현 하동관), '운수 좋은 날'의 동대문, 박목월 시인의 원효로 '심상'까지 서울의 공간들에 대한 남겨진 기억은 아쉬움이 많다. 특히 현진건 고택의 경우는 그분의 문학적·민족적 기여를 고려해봐도 너무 성의가 없고, 소홀하다는 생각이다.

-'아시아미디어타워'가 있는 이 터도 작품 속에 등장하던데.

▲박완서 '나목'의 주인공 이경은 미쓰코시 백화점(신세계 백화점)의 미군 PX에서 명동, 을지로를 지나 계동의 집으로 매일 퇴근한다. 이경이 영화를 보며 사랑을 갈구하던 곳이 '수도극장'이었다. 수도극장은 1935년 약초영화극장으로 개관했다가 해방 후 수도극장으로, 1962년 스카라극장으로 간판을 바꿔 단다. 2002년 12월 철거 후 아시아미디어타워가 자리 잡은 곳이다. 수도극장 이후의 변한 모습이 궁금해서 인터뷰 요청을 받고 아시아미디어타워가 있는 아시아경제를 방문하겠다고 했다. 명동과 을지로 인근은 조선 시대 남촌이었고, 일제강점기 때는 서울의 중심가였다. 특히 영화와 관련해서는 잊어서는 안 될 공간이다. 역사적 의미가 아주 큰 곳이다.

방민호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7일 서울 중구 아시아미디어타워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 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서울의 의미 있는 공간들을 아끼고, 지키기 위한 방안이 있다면.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은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지배받고 있었지만, 인간 삶의 원천인 창조성과 능동성은 더 풍성하게 발현됐다. 이는 문학·예술 분야에서 '경성 모더니즘'으로 분출됐다. 그렇게 보면 일제강점기 문학에 대한 재평가와 당시 문인들의 행적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이상이나 현진건 등이 한국 현대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라면 명실상부한 '이상 문학관', '현진건 문학관'이 있어야 하는데 흔적만 겨우 보존하고 있다. 미처 기념하고 기록하지 못한 역사·문화적 공간들을 발굴해서 문화재나 사적지로 지정하는 것은 물론 일제강점기에 고투했던 많은 문화예술인의 노력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도 꼭 필요하다. 최인훈이 미국에 다녀온 이후 '독립한 지 200년밖에 안 된 나라가 5000년 된 한국보다 더 오래된 나라 같더라'고 쓴 글이 있다. 미국은 모든 역사적 기억과 공간을 모두 축적한다는 말이다. 과거는 과거대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새로운 것이 계속 쌓아가야 한다. 서울이 바로 그런 도시로 탈바꿈해야 한다.

-서울의 미래는 어떻게 그려가야 하는가.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서울의 북촌 지역을 돌아다니는 얘기다. 청계천변 다옥정에서 광교 쪽으로, 보신각에서 화신백화점이 있는 종로 네거리에서 전차를 타고 동대문 훈련원까지 갔다가 다시 조선은행에 내려서 자신이 '도회의 항구'라고 표현했던 경성역까지 걸어간다. 역사적 공간의 존재를 의식적으로 부각한다. 이 소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기라는 역사 속에서 그 과정에 대한 성찰, 식민지적 현대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이처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존을 얼마나 섬세하게 기획하느냐에 따라 서울의 미래는 달라질 수 있다. 최인훈의 글과 박태원의 소설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매력적인 도시로 서울이 남아있을 수 있느냐는 과거를 얼마나 켜켜이 쌓아둘 수 있는가에 달렸다고 본다. 과거의 기억을 재구성하고, 복구하고, 보존해서 몽타주적인 원리가 살아 숨 쉬는 그런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 서울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몽타주 된 공간이 돼야 한다. 병치(竝置)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서울의 미래는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i>◆방민호 교수는?</i>

<i>1965년 충남 예산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국문과 교수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고등 문학교과서의 책임저자이기도 하다. 1994년 <창작과 비평> 제1회 신인평론상 당선으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평론집 ‘문학사의 비평적 탐구(2018)’, ‘감각과 언어의 크레바스(2007)’ 등이 있고, ‘이상 문학의 방법론적 독해(2015)’, ‘일제 말기 한국문학의 담론과 텍스트(2011)’ 등 국문학 저서가 있다. 2001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해 ‘숨은 벽(2018)’ 등 여러 권의 시집과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답함(2015)’ 등의 소설, ‘서울문학기행(2017)’ 등의 산문집이 있다. '서울문학기행'은 경성 모더니즘과 해방 후 문학사 연구의 정수로 손꼽힌다. 문학잡지 <문학의 오늘> 편집 주간으로 한국현대문학사의 시각에서 한국 사회, 역사, 문화를 폭넓게 진단하는 문명비평을 추구하고 있다.</i>

편집국 김종화 기자 justin@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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