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믿음기자
[아시아경제 서믿음 기자] 인생드라마라는 게 있다. 단순히 재미를 넘어서 한 인간의 인생에 굵고 선명한 획을 긋는 그런 작품. 박해영 작가의 ‘나의 아저씨’는 많은 사람에게 그런 작품이다. 종영 후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회자되며 누군가의 인생에 크고 작은 의미들을 남겼다. 영상뿐 아니라 대본 역시 견고히 세워진 건물처럼 내력의 단단함을 글로써 증명하고 있다.
‘나의 아저씨’는 후계동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의 공통분모를 중심으로 차이점을 나열한다. 명목적 주인공은 구조기술사인 대기업 부장 박동훈(이선균)과 아픈 할머니를 홀로 모시고 사는, 살인전과가 있는 이지안(이지은)이지만 사실 이 드라마는 모든 출연진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내비치며 각자의 인생드라마를 펼쳐낸다.
"반세기를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먹고 싸고 먹고 싸고…"라는 상훈(동훈의 첫째형)의 자못 한심스러워 보일 수 있지만 대다수가 마주하는 삶, "아무도 안 볼 때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고 싶은 게 가족이라고"라는 기훈(동훈의 동생)의 인생관, "인생 그렇게 깔끔하게 사는 거 아녜요"라는 제철(동훈의 지인)의 덤덤한 한 마디는 다름 속 같음이 공존하는 인생사를 향한 공감의 고갯짓을 주억거리게 만든다.
‘나의 아저씨’(세계사) 작품집에서 작가는 “시트콤을 오래 했는데, 시트콤에선 모든 인물이 돌아가며 주인공을 한다. 아마도 그때의 습관이 있는 것 같다”며 “그중에 인물이 한번 등장했으면 극 중에서 자기 인생을 살아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 드라마 대본은 영상화를 목적으로 하는 글이기에 이를 연기하는 배우가 분명히 있고, 그들 모두는 자기 세계가 있는 사람이기에 인간적인 대접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잘 쓰려고 하면 영점 조준이 잘못된 것이다. 인물을 아끼고 사랑하자. 사랑이 다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나의 아저씨’는 잘 쓴 걸 넘어서 사랑이 풍부한 대본이다.
‘나의 아저씨’의 백미는 인생사를 압축적으로 담은 대사에 있다. 동훈을 향해 “난 이상하게 옛날부터 작은형이 젤루 불쌍하더라. (...) 욕망과 양심 사이에서 항상 양심 쪽으로 확 기울어 사는 인간. 젤루 불쌍해”라는 동생 기훈의 말. “어떻게 하면 월 오륙백을 벌어도 저렇게 지겨워 보일 수 있을까… 대학 후배 아래서, 그 후배가 자기 자르려고 한다는 것도 뻔히 알면서 모른 척…. 성실한 무기징역수처럼 꾸역… 꾸역…. (밖을 둘러보며) 여기서 제일 지겹고 불행해 보이는 사람…. 나만큼 인생 그지 같은 거 같애서…”란 지안의 말...
그런 이들에게 “내가 유혹에 강한 인간이라서 여태 사고 안 친 거 같애? …유혹이 없었던 거야. …그러니까 모르는 거야. 내가 유혹에 강한 인간인지 아닌지”라고 항변하는 동훈의 말. 지안을 두고 “경직된 인간들은 다 불쌍해. 살아온 날들을 말해주잖아. (…) 상처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려. 그게 보여. 그래서 불쌍해. (…) 걔의 지난 날들을 알기가, 겁난다”고 하는 동훈의 말...
그렇다면 작가는 어떤 대사가 기억에 남을까. 책에서 작가는 “할머니 돌아가시면 전화해”라는 동훈의 대사를 쓰고 왁 울음이 터져 삼십 분을 소리내어 울었다고 술회한다. “처음이라 당황했다”고 할 정도로 그렇게 울다가 자리에 앉았는데 다시 울음이 다서 또 한참을 서성일 만큼. 극중 춘대가 “마음이 어디 논리대로 가나요”라고 했던 말도 인상 깊었다. 이건 담당 피디의 어머니가 드라마를 보고 좋았다며 보내준 말이었는데, 작가는 “사실 저는 무언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행동하고 싶어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미 마음이 간 후에 뒤늦게 논리를 붙이려고 애쓰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드라마의 시작과 끝, 등장인물 구축 과정 등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작가의 말부터 이선균, 이지은 배우, 김원석 감독이 작품집만을 위해 깊고 내밀히 꺼내어준 장장 여덟 시간 분량의 대화까지 빠짐없이 담겼다. 감독이 이 작품을 연출하며 세웠던 방향성과 고민 지점들, 이선균 배우가 들려주는 비하인드 스토리, 이지은 배우의 단상들을 대화와 산문, 1인칭 에세이 인터뷰 형식으로 만나볼 수 있다.
여차하면 지나가버릴 드라마 대사를 오래 곱씹을 수 있다는 것이 대본집의 가장 큰 장점이다. 동훈은 “항상 외력보다 내력이 세게….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세면 버티는 거야”라고 독자를 위무한다.
나의 아저씨 세트 | 박해영 지음 | 세계사 | 808쪽 | 4만96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