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주기자
[아시아경제 한진주 기자] '근면성실'이 직장인의 미덕이었던 시절은 끝났다. '수정', '최종', '최최종' 같은 수식어가 반복되는 보고서를 써내던 문화와도 작별해야 할 때가 됐다. 재택근무가 일상화되면서 불확실한 업무지시나 대면 중심의 보고 문화를 유지하면서 기업이 생산성을 끌어올리기란 불가능해졌다.
비대면 업무가 늘면서 중간 관리자의 역할에도 '언택트 리더십'이 요구되고 있다. 비효율적인 업무에서 탈피해 조직원들의 다양성을 존중할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해져서다. 일하는 문화를 바꿔 한국 경제의 성장을 발목잡았던 낮은 노동생산성의 문제를 고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업무나 커뮤니케이션 방식에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우리의 업무는 이미 디지털로 상당 부분 가능해졌지만 그동안 기업 안팎에서는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엉덩이가 무거운 것을 높이 평가했다. 네트워크, 클라우드, 이메일, 협업 툴 등 디지털 환경에 맞는 업무 체계를 갖추고도 '일하는 방식'의 혁신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다수 기업들은 대면보고나 결재과정, 업무 지시 등을 오프라인으로 하는 것이 기본값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성실'보다는 '성과'를 중시하는 문화로 바뀌어야만 재택근무 시대에도 생산성을 유지하고 높일 수 있다.
기업의 목표 달성을 위해 팀원과 업무 진행 상황 등을 관리하는 것이 주 역할이었던 '중간관리자'에게도 또 다른 리더십이 요구된다. 일각에서는 재택근무가 일상화되면 조직이 수평화되면서 중간관리자의 역할이 모호해질 것이라는 의미에서 '중간관리자의 소멸'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일종의 '피자형 조직'으로 변할 것이란 예측이다.
하지만 실제로 재택근무를 도입한 기업들의 얘기는 다르다. 중간관리자가 사라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역할이 커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이승찬 NHN 인사총무지원실 이사는 "중간관리자의 역할은 오히려 더 늘어날 것이다. 재택근무 중에 소외될 수 있는 직원들이나 신규 입사자들이 안착할 수 있도록 챙겨야 할 부분이 더 많다"며 "리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직원들의 마음도 관리해줘야 한다. 성과로 평가하는 문화가 확산되면 업무 실력에 따라 구분되는 격차까지 더 잡아줘야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NHN은 버크만 진단, MBTI 등 성격 유형 검사 등을 통해 조직장이 팀원의 여러 성향에 맞게 커뮤니케이션 하는 방식을 알려주는 워크샵 등을 도입할 계획이다.
재택근무와 스마트워크 시스템에 맞는 업무 평가는 보다 더 '성과'중심으로 바뀔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승찬 이사는 "어디서 얼마나 근무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일정을 얼마나 준수했는지, 결과물이 얼마나 좋은지를 더 따지게 될 것"이라며 "개인 이기주의가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보다 결과물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더라도 직원들이 항변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재택근무로 수행한 업무에 대한 평가 방식, 업무 특성상 재택근무가 불가능한 부서와의 형평성 문제도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것이 재택근무를 경험한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7년차 직장인인 최두영(가명) 씨는 "재택근무가 원활하게 이뤄지려면 업무가 명확하게 주어져야 책임도 분명해진다. 제도적으로도 발전해야 할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이명호 여시재 선임연구원은 "일의 일부가 '전산'이었던 시대를 넘어 이제 개발자도, 기획자도, 스탭부서도 모든 업무의 결과물이 '디지털'이다. 일이 변했다"며 "한국은 인터넷 속도가 빠르다는 자부심은 있었지만 일하는 방식은 여전히 구식이었다. 이제 성과 중심으로, 실력있는 사람들만 살아남는 문화로 바뀌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동안 우리나라 기업 문화는 성과보다는 눈에 보이게 일을 잘하는 지를 더 중시했고 업무 지시와 커뮤니케이션이 명확하지 않았다. 적당히 지시해 보고받고 수정하도록 일하는 방식도 비효율의 하나였다"며 "우리나라의 노동생산성이 낮은 편이었지만 재택근무라는 경험을 통해 생산성 향상에 장애가 되었던 오래된 관행들을 없애는 계기로 만들어야한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이후 '언택트' 문화가 활발해진 것은 불합리한 조직 문화를 거부하는 90년대생의 등장과도 맥을 같이 한다. 밀레니얼 세대들은 디지털에 익숙하고 기성세대가 유지해왔던 비효율을 거부하지만, 성장욕구 또한 높다. 이런 세대들이 기업이라는 조직에 뛰어들면서 기업의 낡은 구조가 더 부각되기도 한다. 이들은 재택근무와 화상회의로 새로운 업무 방식에 익숙해졌고 동료들과의 회식 대신 개인의 여가생활이 늘어난 문화에도 보다 빨리 적응했다.
밀레니얼 세대들은 '평생직장'을 원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보다 나은 직장으로 옮겨갈 기회를 찾는다. 밀레니얼 세대를 소비자로 둔 기업이 트렌드를 놓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결국 함께 변해야 한다. 구찌가 밀레니얼 세대 직원들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젊은 직원을 멘토로 두는 '리버스 멘토링'을 도입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부 교수는 "과거의 젊은 세대들은 시키면 시키는대로 했었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어떤 업무를 하라고 요구하면 왜 해야하는지를 납득하는 것이 우선이며 본인이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때 더 몰입한다"며 "중간관리자들은 조직에 합류하는 밀레니얼 세대 팀원들에게 일의 의미를 명확하게 설명해줘야 하고 팀웍이 형성되기 어려운 온라인 환경에서 효율적인 방안을 고민해야 하는 만큼 새로운 역할이 필요해졌다"고 말했다.
한진주 기자 truepearl@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