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어사전] 밥경찰 - 도둑보다 무서운 맛없는 반찬

[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은 1611년 일가의 과거 부정 합격을 주도했다는 누명을 쓰고 전라도 함열(현재 익산시 함라면)로 유배길에 오른다. 당대의 미식가로 이름을 날린 그에게 시골 유배지 밥상은 고문에 비견할 만큼 고통을 안겼다. “내가 죄를 짓고 바닷가 고을로 유배된 뒤로는 쌀겨, 싸라기조차 넉넉지 않아 밥상에 오르는 것은 오직 부패한 뱀장어와 누린내 나는 생선, 쇠비름(오행초 나물), 돌미나리 같은 것뿐이었다. 그래서 날마다 양을 배로 먹어도 저녁 내내 허기가 들곤 했다.” 허균이 직접 당시 심경을 적은 글에선 반찬의 맛없음이 생생하게 전해올 정도다. 다산 정약용 또한 1801년 신유사옥 때 천주교 신자로 체포, 경상도 장기(현재 포항시 장기면)에서 유배 생활을 시작하는데, 당시 빈한한 밥상을 절절한 시 구절로 한탄했다. “꽃게의 붉은 엄지발이 참으로 유명하건만 아침마다 만나는 건 가자미국뿐이구나. 개구리, 뱀은 물론이고 밀즉(꿀에 절인 새끼 쥐)까지 먹는데도 남쪽 음식 북쪽과 다르다 말하지 않는다.”

밥경찰은 입맛을 돋워 밥을 많이 먹게 하는 반찬을 이르는 밥도둑의 반의어로, 반찬이 하도 맛없어서 식욕을 떨어트려 밥을 지키게 하는 경우를 지칭한다. 주로 군부대나 학교 급식 반찬을 두고 자주 언급되는데, 정도가 심한 경우엔 밥검찰로 불리기도 한다. 대표적인 밥경찰로는 콩자반, 파래무침, 미역튀각, 도라지무침, 애호박 볶음, 가지무침, 우엉조림, 콩나물국 등이 거론된다. 먹어도 허기진 밥상을 원망하던 허균은 자신이 살면서 맛본 최고의 음식들을 재료와 조리법, 맛의 기억까지 불러올려 명저 <도문대작>을 남겼고, 가자미국에 한탄하던 정약용은 “소신 다시는 남가일몽(헛된 꿈) 꾸지 않고 강가에서 낚시꾼이나 되는 것이 소원”이라며 천주교를 믿은 자신의 과거를 조용히 반성했다. 통상 집단급식소에서 외통수로 맞닥트리는 밥경찰의 등장에 현대인들은 편의점과 PX로 빠르게 응수하고 있다. 새삼 라면과 도시락의 존재가 고마워지는 이유다.

용례

A : 휴가 잘 다녀왔어? 어머님이 맛있는 거 많이 해주셨고?

B : 예! 간장게장, 양념게장에 갈비랑 굴비 실컷 먹고 왔습니다.

A : 이야... 완전 밥도둑 특집이네. 그나저나 오늘 저녁 메뉴는 뭐래?

B : 오늘 저녁 식단은 쌀밥에 김치, 파래무침, 조기 튀김, 해물비빔소스, 그리고 콩나물국입니다.

A : 와, 밥경찰이 아니라 밥검찰이 따로 없네. 안 되겠다. PX 가서 냉동에 뽀글이나 먹자.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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