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 착한 가족/이원호

정말 죄송합니다

오래오래 살아서 집세도 주고

세금도 꼬박꼬박 내야 하는데

이렇게 일찍 가서 미안합니다

해바라기 좋아하는 딸아이

시원한 그늘 속에서 자꾸 말라 가요

월세와 공과금 고지서가 달려와

먼저 손을 내밀어요

일수 찍듯 또박또박 일했는데

사장은 정중하게 내 등을 밀었어요

라면을 매일 먹을 수 있다니!

방 안은 쫄깃한 면발로 가득해요

천국으로 가는 차표는

믿음으로 살 수 있다면서요

몸이 퉁퉁 불어 더 이상 먹으면

풍선처럼 뻥 터질 것 같았어요

번개탄 피었나요 꽃처럼

석촌호수 물안개 피어오르듯

연기의 등을 타고

해를 향해 솟아올라요

강은 울고 있는데

입안은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데

밥이 하늘

하늘이 밥이라는데

우리만 먼저 가서 정말 미안해요

■ 이 시는 2014년 2월 발생했던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비참하고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 올 여름엔 관악구 임대아파트에서 두 달 전에 아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탈북 모자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11월엔 성북동에서 70대 어머니와 40대 딸 세 명이 "그동안 힘들었어요. 죄송합니다. 하늘나라로 갑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일이 있었다. 알려지지만 않았지 어디 이들뿐이겠는가. 따뜻한 겨울 저녁이 다만 죄스러울 따름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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