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충훈기자
왼쪽부터 염상섭, 이호철, 최인훈, 함석헌 (일러스트 이영우 기자 20wo@)
저자는 제1장에서 해방 이후 탈냉전을 구상했던 초기 인물로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였던 염상섭을 꼽는다. 그는 좌우파에 치우치지 않는 '중간파'로서의 변혁을 추구했다. 하지만 중간파는 1948년 신탁통치 즈음해서 회생한 우파 세력으로부터 극렬한 비난을 받았다. 우파는 중간파를 '민족 스스로의 힘을 중시하는 세력'이 아닌 '빨갱이임을 슬쩍 감춘 분홍색 프락치' 정도로 봤다. 남한 단독 선거를 앞두고 남북이 합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중간파들은 우파로부터 '공산주의자들의 앞잡이'로 치부됐다.염상섭은 소설 '효풍'을 통해 이 같은 분위기를 개탄한다. 효풍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병직은 무산독재도, 일당독재도 아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결합한 제3의 체제를 꿈꿨고 이는 작가인 염상섭도 마찬가지였다. 염상섭은 자신이 편집국장으로 재직했던 신민일보가 좌파적 논조를 문제 삼은 미군정에 의해 폐간되고 본인도 구류를 살면서 심정적인 굴복을 하고 만다. '효풍'도 흐지부지한 결말로 맺음한다. 하지만 중간파의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47년 창간한 새한민보가 대표적이다. 보름마다 한 번씩 발행한 이 신문은 '신문의 신문'이라는 코너를 통해 여러 매체의 기사를 분석하고 그 편집방향과 방침을 비판했다. 좌우 한쪽 성향의 매체가 사실을 왜곡하거나 전혀 다루지 않는 상황에 개입해 '팩트체크'를 함으로써 미군정의 언론탄압에도 효과적으로 대처했다고 저자는 분석했다.'숨겨진 미래'는 '중간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농민' '전쟁 포로' 등 특정 상황에 있었던 이들의 이야기도 다룬다. '농민' 편에선 미군사 정부가 첫 호부터 80만부나 발행했던 농업 신문 '농민주보'의 의미를 파헤친다. 당시 미군정은 농민주보를 통해 '농민=이 땅의 뿌리'라는 개념을 심는 데 주력했다. 정부는 농민이 생산한 쌀을 독점 수매하고 이를 다시 도시 노동자에게 저렴하게 공급해 식량배급 불만을 잠재웠다. 저자는 농민주보가 "농촌의 동포들은 다만 그 본분을 좇고 따르고" 지킬 것을 주문하는 권력의 미디어, 치안의 미디어라고 비판했다. 저자는 1946년 농민, 노동자, 학생이 연대했던 대구 10월 항쟁이 이 같은 직분 프레임을 거슬러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으려했던 시도였다고 평가했다.반둥회의(1955)
중국과 인도를 비롯한 제3세계 비동맹이 미ㆍ소 양국이 아닌 다른 길을 모색하려 했던 '반둥회의'도 냉전을 거스르는 중요한 움직임이었다. 한국은 모임의 주체가 한국전쟁에서 북한을 도왔던 중국이라는 이유로 이 모임에 불참했으나, 제3의 길을 모색하는 반둥회의 정신은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의 평화통일론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식민지' 파트에 소개된 최인훈의 소설 '총독의 소리'도 눈길을 끈다. '총독의 소리'는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이후에도 조선총독이 여전히 한반도에 숨어 지내며 해적라디오 방송을 한다는 설정의 소설이다. 총독은 "통일의 가장 쉬운 길은 남북이 군비 경쟁을 버리고 각기 체제의 합리성을 높여가는 길"이니 "총독부는 반도인들이 이 같은 해답에 다가서는 길을 막아야 한다"는 말도 한다.저자는 총독의 이 같은 말들이 24년 뒤인 2000년 6ㆍ15 남북공동선언을 연상시킨다고 썼다. 당시 6ㆍ15선언의 두 번째 항이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이다. 최인훈의 선구적인 통찰력에 새삼 경탄하게 되는 대목이다. 수십 년 전 냉전기 지식인의 말을 오늘날까지 기억해야 할 좋은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