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길기자
바다낚시
문명이 발달하기 전까지 인류는 생존을 위해 고기를 잡았다. 가족과 친족 집단, 공동체, 경우에 따라서는 가깝거나 먼 이웃까지도 먹여 살렸다. 함께 협력해서 고기를 잡는 경우는 드물었다. 후릿그물이 설치되거나 마을 사람들이 메기의 산란기나 연어 떼를 활용하는 경우가 아니면 웬만해선 없었다. 그런데 이 짧은 시기에 인간은 물고기 수천 마리를 잡아서 내장을 제거하고 건조시켜야 했다. 고기잡이 기술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생존형 고기잡이와 차원이 달랐다. 인구가 조금씩 늘면서 어부들은 함께 협력해 잡은 물고기를 시장이나 신전에 가져다줬다. 그 순간 물고기는 개인과 친족을 위해 잡는 식량이 아닌 상품이 됐다. 일부 공동체가 사실상 전업 어부가 되어 도시나 마을의 시장에서 생선을 물물 교환하거나 판 것이다. 나중에는 귀족과 평민에게 똑같이 보급되는 표준 배급 식량이 되기도 했다. 그 최초의 증거는 고대 이집트에서 발견된다.당시 나일강에서는 메기가 특히 산란기에 쉽게 잡혔다. 메기는 내장을 빼낸 뒤 거대한 건조대 위에서 열대의 태양 빛을 받으며 말려졌다. 기자의 피라미드 지대에는 이렇게 생선을 가공한 거대한 건물이 지금도 남아 있다. 당시 당국자들은 어부들에게 조별로 일정한 기간 내의 특정 할당량을 지정해 주었다. 특히 범람한 물이 빠지는 시기에 더욱 철저히 지정했다. 마을 주민들은 대형 후릿그물을 치고 끌어당겨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 이들이 수백 년에 걸쳐 고대 이집트의 공공건물, 신전, 무덤 등을 건설한 이들을 먹여 살리는데 일조한 셈이다. 페이건 교수는 "초기 문명은 대부분 강어귀, 호수, 강 인근, 아니면 대양에 접근하기 쉬운 위치에서 꽃피웠다"며 "도시 외곽, 즉 중대한 의례가 벌어지는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어촌의 그득그득 채워진 바구니와 카누가 없었다면 수많은 고대 문명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당암포구에 몰려든 고등어낚시꾼들.
하지만 피라미드 건설 같은 대대적 공공사업은 결국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무분별한 어류 남획을 불러왔다. 서남아시아와 중국의 수렵채집인이 채집 생활에서 야생 곡물을 계획적으로 재배하는 생활로 갈아타게 되었듯, 고기잡이 공동체도 필연적으로 양식을 필요로 하게 됐다. 양식은 도시와 시골에서 증가하는 인구, 어획량의 불확실성, 상선과 군함의 대인원을 먹일 대규모 식량 수요의 증가에 따른 대응책이다.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공급원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거대 사업으로 유지된다. 어장량이 무한하다는 식의 여유를 부릴 처지가 못 되는 상황에서도 한동안 지속되리라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몇 세대가 채 지나지 않아서 지구상 물고기는 거의 모두 자연산에서 양식으로 바뀔지 모른다. 이집트의 관리들이 개발한 전략이 백만 년 넘도록 이어져 온 야생에서의 고기잡이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꿰찰 수 있는 것이다.영국의 수필가 아이작 월턴은 "물이 땅보다 생산력이 더 풍부하다"고 했다. 그러나 어업의 산업화와 인구 증가, 기술 혁신이 맞물리면서 이 말은 맞지 않을 수도 있게 됐다. 페이건 교수는 "해양 자원을 광범위하고 엄격하게 관리하며 거대한 망을 구축하는 동시에 체계적으로 서식지를 보호함으로써 물고기 교역과 자연 보호에 두루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책은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런 자세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러면서 월턴이 칭송한 어부의 자질인 근면성과 관찰력, 훈련을 상기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가 고기잡이의 역사를 세세하게 들여다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이 교훈을 잘 따라왔다. 하지만 지난 몇 백 년 사이에 근면성은 파괴적 어획에 밀려나 버렸다. 페이건 교수는 경고하듯 권유한다. "풍요로웠던 바다를 영영 사막화시키고 싶지 않다면, 지속가능한 어업은 월턴의 '조용한 낚시'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예술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편이 낫다. 안 그러면 바다에서 더 이상 물고기를 구경하지 못할 테니까."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