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코어 성인잡지 '허슬러'는 어떻게 미국 언론의 자유를 지켜낼 수 있었나?
미국의 하드코어 포르노잡지 '허슬러'의 창간인 래리 플린트는 미국 언론 자유의 상징적 인물로 회자된다. 그래픽 = 이진경 디자이너
[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휴 헤프너의 죽음으로 함께 주목받고 있는 ‘허슬러’ 창간인 래리 플린트의 삶은 미국 언론 자유의 상징으로 요약된다. ‘즐거운 사라’ 필화사건으로 질곡의 삶을 살다 세상을 떠난 마광수 교수의 “너무 두들겨 맞은 게 억울하다”는 항변은 래리 플린트의 그것에 비하면 점잖은 호소였으나, 우리 사회의 보수성은 이를 수용하기엔 아직도 높고 견고했다. 래리 플린트가 외쳤던 ‘표현의 자유’는 미국의 언론과 그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았을까?래리 플랜트가 잡지 ‘허슬러’를 창간한 1974년엔 이미 ‘플레이보이’와 ‘펜트하우스’가 시장을 선점하고 있던 시기였다. ‘미국인의 성생활을 그대로 보여드립니다’라는 잡지의 캐치프레이즈는 말 그대로 위선과 가식 없는 ‘그대로’의 화보와 기사내용을 표방했다. 포르노 배우의 성교 장면, 노골적인 정사 화보는 미국 내에서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기사의 논조 또한 좌파성향의 직설적 표현 위주였다. 만평 역시 높은 수위를 자랑했다. 그리고 이 거침없는 표현 수위로 ‘허슬러 vs 폴웰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래리 플린트와 제리 폴웰 목사. 사진 = Law Library
대통령과 유명 종교인의 애널 섹스, 키신저 국무장관이 자유의 여신상을 범하는 삽화 정도는 사실 허슬러가 자주 다뤄온 주제였다. 하지만 1983년 11월 판에 기독교 원리주의자 폴웰 목사가 성적으로 문란한 어머니와 성관계를 했다는 가짜 인터뷰 기사를 싣고 ‘이것은 광고 패러디인 만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시오’라고 덧붙여 내보내자 즉각 폴웰 목사로부터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다. 연방대법원까지 간 이 재판에서 래리 플랜트는 미국 수정헌법 제1조를 내세워 표현의 자유를 주장했다. 보수적인 판사들과 기독교 단체의 시위에 시달리며 재판을 이어간 그는 법원을 나서던 중 누군가의 총에 맞아 하반신이 마비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당초 재판 패소가 예상됐던 것과 달리 미국 언론사들은 플린트가 유죄를 받게 될 경우 향후 언론의 공인에 대한 풍자와 비판이 침해당할 것을 우려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수주의자로 명성을 얻은 당시 대법원장 윌리엄 렌퀴스트는 이 재판에서 “공무원과 공적 인물을 풍자하는 것이 불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판결을 내렸다. 그 시작과 과정이야 어찌 됐든 래리 플랜트가 주장한 ‘표현의 자유’는 지켜낸 셈이었다.재판 당시 래리 플랜트는 “만약 내가, '허슬러'가 보호받을 수 있다면 미국의 모든 사람들과 매체도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고 소감을 밝혔다. 저속하고 난잡한 도색잡지조차 표현 자유를 보장받는 사회라면, 어떤 매체든 자유롭게 비판하고 의사를 표현할 수 있음을 시사한 말이었다. 이 재판은 미국 성인 출판업계 최전방에서 역설적으로 미국 언론의 자유를 쟁취해낸 기념비적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center><div class="slide_frame"><input type="hidden" id="slideIframeId" value="2017092815254089077A">
</center>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