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
서시,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 양귀비(楊貴妃)를 중국의 4대 미인이라고 한다. 이들에겐 각각 별명이 있다. 강의 물고기가 빨래하는 서시의 미모에 홀려 지느러미 흔드는 것을 잊어서 물밑으로 가라앉았다고 해서 서시를 ‘침어미인(沈魚美人-물고기를 가라앉힌 미인)’이라 하고, 한나라 때 흉노와의 화친 조건으로 북쪽으로 끌려가는 말위에서 비파를 타는 왕소군을 보다가 날아가는 기러기가 날개 짓 하는 것을 잊어 땅에 떨어졌다고 해서 왕소군을 ‘낙안미인(落雁美人-기러기를 떨어뜨린 미인)’이라 부른다. 초선이 밤중에 달을 쳐다보고 있는데 달 속의 항아(姮娥)가 자신의 미모가 초선에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여 구름 속으로 숨었다고 해서 초선을 ‘폐월미인(閉月美人-달을 가둬버린 미인)’이라 부르고, 양귀비가 꽃구경을 하다가 꽃을 쓰다듬으니 꽃잎이 움츠렸다고 하는데 꽃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고 부끄러워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양귀비는 ‘수화미인(羞花美人-꽃을 부끄럽게 한 미인)’으로 불렸다. 이들 중 으뜸으로 꼽히는 미인이 서시인데 그녀는 절강성 소흥 근교에 있는 제기시의 저라산(苧蘿山) 아랫마을에 살았다. 본성명은 시이광(施夷光)이지만 마을의 서쪽에 살았기 때문에 서시라 불렸다. 아버지는 땔감을 팔고 어머니는 강에서 빨래를 하며 가난하게 살았다. 마을 뒤에 있는 저라산은 산이라기보다 높이 10여 미터에 불과한 언덕으로 모시풀[苧蘿]이 많이 자란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모시로 만든 천을 빨고 표백하는 일을 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서시도 어렸을 때부터 마을 앞의 강에서 어머니를 도와 빨래를 했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 앞에는 큰 강이 흐르고 있는데 이름이 ‘완강(浣江)’이다. ‘浣’은 ‘빨래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평범하게 생활하던 시골 처녀 서시에게 일생일대의 전기를 마련해준 인물이 범려였다. 오왕 부차(夫差)에게 패배하고 인질로 잡혀 굴욕적인 나날을 보낸 월왕 구천(句踐)은 가까스로 귀국하여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복수의 기회를 엿보던 중, 대부 문종(文種)의 건의를 받아들여 미인계를 쓰게 된다. 이 미인계를 집행하는 일을 범려가 맡았고 그는 미인을 구하기 위하여 전국을 다니다가 이 마을에서 빨래하는 서시를 발견했다. 당시 범려가 선발한 처녀가 몇 명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들은 오나라로 보내지기 전에 집중적인 훈련을 받았는데 그 중 가장 빼어난 미모를 지닌 서시와 정단(鄭旦)이 최종적으로 뽑혔다. 구천은 당시 월나라의 수도였던 지금의 소흥시 동북쪽에 미인궁을 지어 이들에게 비단옷을 입히고 곱게 화장을 시킨 후 걸음걸이, 궁정 예절, 춤, 노래 등을 익히게 했다. 서시는 15세 무렵 이곳에 들어와서 3년 동안 훈련을 받고 오나라에 보내졌다. 이들이 훈련을 받았던 미인궁은 지금 소흥시의 홀리데이 인 호텔 바로 앞에 복원되어 있다. 서시를 선물 받은 부차는 그녀를 위하여 고소대(姑蘇臺)라는 호화로운 전각을 짓고 밤낮없이 서시와 환락에 빠졌다. 이곳에서 그녀는 15년 동안 지내면서 빼어난 미모와 슬기로운 처신으로 부차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 성공했다. 드디어 BC 473년 구천은 이틈을 타서 오나라를 공격했다. 전쟁에 패하여 쫓기던 부차는 고소대로 도망하여 구천과 화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므로 오나라 쪽에서 보면 서시는 나라를 망친 요물이었지만 월나라로서는 큰 공을 세운 영웅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서시를 위하여 그 고장에서는 일찍부터 사당을 짓고 그녀의 공을 기렸다. 사당은 그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하다가 1986년에 다시 전면적으로 재건하여 ‘서시전(西施殿)’이란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시전
서시전에는 ‘저라명주(苧蘿明珠-저라산의 밝은 구슬)’, ‘절대가인(絶代佳人-절세미인)’ 등의 편액이 걸려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높이 2.8m의 서시 좌상이 눈에 들어온다. 이 좌상은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져서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낼 만큼 아름답다. 그리고 서시상 위쪽에는 ‘하화신녀(荷花神女)’라 쓰인 편액이 걸려 있는데 ‘하화’는 연꽃이다. 진흙탕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연꽃처럼 서시도 비천한 민간 출신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 고장 사람들이 그녀에게 ‘하화신’의 명칭을 부여한 것이다. 서시전 오른쪽 언덕의 고월대(古越臺)에는 ‘와신상담’ 편액 밑에 구천, 범려, 문종 3인의 흉상이 있다. 서시와 이 세 사람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고월대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비랑(碑廊)이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서시를 읊은 고금의 시문과 갖가지 모습의 서시가 수십 개의 오석에 새겨져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서시의 일생을 수십 매의 그림과 설명문으로 전시하고 있는 서시장랑(西施長廊)이 나온다. 이밖에도 이광각(夷光閣), 침어지(沈魚池)가 있는데 ‘이광’은 서시의 본명으로 이광각은 그녀를 기념하기 위한 정자이고, 침어지는 그녀의 미모에 홀려 물고기가 가라앉았다는 이야기를 상징하는 연못이다. 구천이 오나라를 정복한 후 서시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후의 서시의 거취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고향인 제기로 돌아와 살다가 물가에서 발을 헛디뎌 익사했다는 설이다. 둘째는 구천의 부인이 서시의 몸에 돌을 매달아 강에 빠뜨려 죽였다는 설이다. 구천이 회군할 때 서시를 같은 배에 태우고 돌아오면서 장치 서시를 후궁으로 삼으려 했는데 이를 알아차린 부인이 질투심에서 서시를 가리켜 “나라를 망하게 한 물건이니 남겨 두어서 무엇 하겠는가”라 하고 몰래 강에 빠뜨려 죽였다는 것이다. 셋째는 오나라가 망한 후 범려와 함께 멀리 떠났다는 설이다. 워낙 오래 된 일이고 또 정사(正史)에 남긴 기록도 없기 때문에 어느 설이 옳은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후대인들은 전설과 같은 세 번째 설을 믿으려 한다. 세 번째 설의 경우에도 범려가 서시를 데리고 떠난 동기에서 다시 의견이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범려와 서시가 연인 사이었다는 것이다. 범려가 서시를 처음 만났을 때 이미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하여 연인이 되었지만 국가를 위하는 일이라 범려가 서시를 오나라로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또 수많은 전설이 만들어져, 그들은 태호(太湖) 안의 오리호(五里湖)에서 배를 타고 멀리 떠나 지금의 의흥(宜興)에 정착하고 도자기를 빚어 유명한 자사기(紫砂器)의 시조가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범려가 나라를 위한 충정에서 서시를 데리고 떠났다는 것이 또 하나의 동기이다. 즉 서시를 월나라에 그대로 두면 월왕 구천 또한 서시의 미모에 홀려 나라를 망칠 것이기에 서시를 데리고 멀리 떠났다는 것이다. 서시와 관련해서 만들어진 이런 저런 이야기 자체가 워낙 흥미로워 수많은 버전이 생겨났고 이것이 후대 시인들의 시심(詩心)을 자극하여 많은 문학작품이 창작되었다. 이 중에서 우리나라 고려의 문호 이제현(李齊賢)이 쓴 '범려'가 단연 압권이다. 공을 논함에 어찌 강한 오나라 격파한 것 뿐이리오 가장 큰 공은 오호(五湖)에서 배 띄운 것이라네 서시를 데리고 가지 않았더라면 월궁(越宮)에 또 하나의 고소대(姑蘇臺)가 생겼을 터 서시를 데리고 떠남으로써 구천이 부차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한 것이 범려의 가장 큰 공이라는 것인데, 중국에서도 범려와 서시를 다룬 시가 수많이 쓰여 졌지만 이와 같은 착상을 한 시는 없었다. 서시와 관련하여 ‘동시효빈’이라는 4자성어가 만들어졌다. ‘효빈’은 ‘찡그림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동쪽 마을에 사는 못생긴 여자 동시가 서쪽 마을의 미인 서시의 찡그림을 본받아 자기도 찡그린다는 것이다. 서시는 평소 가슴앓이로 인해 얼굴을 찡그렸는데 동시가 그걸 따라 한다는 뜻으로 동시효빈은 ‘무턱대고 남을 모방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서시는 원래 아름다워 찡그리는 것도 예뻤지만 동시의 찡그림은 결코 예쁘지 않은 것이다. '장자'에 나오는 이 우화는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무턱대고 남을 모방하려는 태도에 대한 경계이다. 송재소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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