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외면과 영웅의 등장 불의가 창궐하여 세상이 어둠에 빠져들 때 인간은 신을 찾는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정의의 빛을 다시 밝힐 수 없을 때 신에 대한 갈구는 더욱 더 간절해진다. 하지만 신은 인간의 세상사에 일일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세상사는 여전히 인간의 몫으로 남겨진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의를 이겨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신의 힘을 빌릴 수도 없는 그런 절망적인 순간에 등장하는 이가 바로 영웅이다.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은 사회는 영웅에 기초하며, 역사는 영웅들의 전기라고 했다. 역사 발전의 주인공을 기층 민중으로 보는 시각과는 달리, 불세출의 영웅에 의해 역사가 발전한다고 봤던 것이다. 그렇다면 영웅이 하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선과 악의 뿌리 조지 루카스 (George Lucas) 감독의 스타워즈(Star Wars) 시리즈는 영화가 시작될 때 독특한 형태의 자막을 띄우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주 먼 옛날 은하계 저편에는…'으로 시작하는 이 자막은 스타워즈 시리즈의 각 에피소드들의 출발 배경을 말해준다. 에피소드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악에 대한 선의 투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자막의 주된 내용이다. 이후 전개되는 각 에피소드들은 선과 악 사이의 치열한 대결 과정을 담아낸다.스타워즈 시리즈의 가장 극적인 대사는 '에피소드 5: 제국의 역습'에서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가 변절한 제다이 기사 다스 베이더와 싸우는 장면에서 나오는 "내가 너의 아버지다(I'm your father)"라는 대사일 것이다. 똑 같은 제다이 기사지만, 아버지는 변절하여 악의 화신이 되었고, 그런 아버지의 존재조차 모르고 자라난 아들은 정의의 수호자가 되었다. 그 아들과 아버지가 서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결을 펼치는 것이다. 이 장면과 대사는 선과 악의 뿌리가 과연 다른 것인지를 우리에게 진지하게 묻고 있다.우리는 흔히 악의 뿌리를 바깥에서 찾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적절치 않다. 인간의 마음에는 선으로 꽃필 수도 있고, 악으로 화할 수도 있는 하나의 동일한 잠재적 뿌리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볼 때 루크 스카이워커와 그의 아버지인 아나킨 스카이워커, 즉 다스 베이더의 대결은 우리의 마음속 깊이 내재해 있는 선과 악 사이의 치열한 갈등을 상징한다.정신분석학을 창시한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인간의 원초적 마음을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냥 '그것(It, 독일어로는 Es)'으로 불렀다. 이 '그것'이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파괴적 충동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의 한없는 사랑과 헌신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인간에게 있어서만큼은 크게 칭찬해야 할 대상도 자기 자신이고, 크게 꾸짖고 물리쳐야 할 대상도 자기 자신이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가 말했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은, 최소한 심리학적 견지에서 보자면, 자기의 자기에 대한 투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영웅의 모험 길: 죽음과 재탄생 영웅신화의 세계적 권위자라 할 수 있는 신화 심리학자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은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라는 책에서 여러 문화에 걸친 영웅신화의 보편적 내용을 분석하여 영웅이 떠나는 모험 길을 정리하여 제시한 바 있다. 운명의 부름을 받고 모험 길을 떠나는 영웅에게 가혹한 시련이 닥치고,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영웅은 소명 완수에 실패하지만, 운명의 도움으로 거듭난 끝에 소임을 다하게 된다는 것이 대체적인 윤곽이다. 우리가 즐겨 읽었던 무협소설 주인공의 궤적과 크게 다르지 않다.이 모험 길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죽음과 재탄생이다. 즉, 모험 길을 가는 과정에서 기존의 영웅은 죽고 새로운 영웅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 중심 줄거리인 것이다. 새로운 영웅은 기존의 영웅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핵심적인 차이는 세상사를 바라보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다는 점이다. 이전의 시시비비들은 더 이상 시비 거리가 되지 않으며, 더 이상 세속적 논리에 의해 세상을 재단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세속의 적이었던 모든 악의 무리들은 더 이상 새로운 영웅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영웅이 걷는 이런 모험 길은 스타워즈의 기본 줄거리이기도 하고, 나사렛 예수가 걸었던 길이기도 하고, 중생이 해탈의 길로 나아갈 때 반드시 거치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불교수행법의 세계적 자랑거리기도 한 화두선(話頭禪)은 수행자에게 참다운 지혜를 얻기 위해 기존의 관념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릴 것을 요구한다. 즉, 기존의 관념체계로는 도저히 해득할 수 없는 물음, 즉 화두를 던짐으로써 수행자가 자기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영웅의 모험 길에서 죽음과 재탄생을 해석하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지만, 모험의 과정에서 어떤 근본적인 변화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런 근본적 변화는 처절한 자기성찰을 통해 기존의 자아가 죽고 새로운 자아가 출현해야 가능해지는 것이다. 영웅의 출현을 기다리는 사회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정의의 실종과 불의의 지배, 그리고 대중들의 고난이 대표적이다. 그렇기에 영웅은 정의를 다시 세우고, 대중을 고난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문제해결자여야 한다. 또한 영웅은 기존의 잘못된 모순과 관행들을 일거에 바꿔버리는 혁신적인 게임체인저(game changer)여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이면서도 신을 대리하는, 그리고 신이 아니면서도 보통의 인간으로서는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거짓 영웅 판별법 위기는 기회라고 했다. 문제는 이 어지러운 시국에 누가 우리가 처한 위기를 기회로 바꿀 것인지, 또 누가 진정한 영웅이고 누가 거짓 영웅인지를 가려내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것이다. 역사상의 난세들에서 영웅에 힘입어 평화와 번영이 회복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간웅(奸雄), 즉 거짓 영웅들 탓에 혼란이 더 심화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진정한 영웅을 자처한 이들이 있다. 어떤 이는 적폐를 청산하겠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공정하고 투명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하고, 강력한 외국정상들을 감당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말만 놓고 본다면 이들 모두가 대통령을 해도 무방할 듯싶다. 하지만 우리는 직전 대통령이 탄핵이라는 불행한 결말을 맞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더 냉철해져야 한다. 그들의 말에 현혹되지 않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 자체의 됨됨이와 능력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판단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 사회에 새로운 기회가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다행스럽게도 거짓 영웅들을 가려낼 수 있는 몇 가지 방법들이 있다. 심리학적으로 고찰해보면 거짓 영웅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첫째, 거짓 영웅들은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다. 모든 나르시즘적 인간들이 그렇듯이, 거짓 영웅들은 겉으로는 아무리 아닌 척해도 자신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 거짓 영웅들은 자신을 과장한다. 혼탁한 세상을 바로잡을 능력이 태부족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떠벌리기에 바쁘다. 셋째, 거짓 영웅들은 사람들을 편 가른다. 자신과 함께 하는 동지들만 아우를 뿐 비판적인 반대세력들은 포용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거짓 영웅들이 걸어온 길은 덧셈보다는 뺄셈의 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넷째, 거짓 영웅들은 성찰하지 않는다. 진지하게 자신을 검토하거나 반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령 그들이 그렇게 해왔다고 주장하더라도 그것은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 자신의 잘못보다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더 크게 지적하는 이가 바로 거짓 영웅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이자 제일 중요한 특징은 거짓 영웅들에게는 근본적인 변화, 즉 환골탈태의 경험이 결코 없다는 것이다. 기존의 자신이 죽고 새로운 자신으로 거듭나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 또한 자기 안에 존재하는 선과 악의 구분 경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봐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수 없다. 진정한 영웅이 무너뜨리는 것은, 근본적인 의미에서는, 자기 바깥에 놓여 있는 대상화된 악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과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만연해 있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분이 극복의 대상인 것이다. 그런 극복을 행동을 통해 보이지 않는 자, 또 자신이 근본적으로 변화했음을 행동으로 증명하지 않는 자, 그 자가 바로 거짓 영웅이다. 조성호 (가톨릭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조성호 교수는 : 1965년 경북 청송에서 태어나고 대구에서 성장했다. 서울대 심리학과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마치고 ‘심리치료에서의 저항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여성가족부 정책자문위원과 전국대학상담센터협의회장을 역임했고, 가톨릭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재 한국상담심리학회 회장, 가톨릭대학교 상담심리대학원장, 한국심리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분열성 성격장애’, ‘경계선 성격장애’, ‘상담의 연구방법’, ‘상담심리학의 기초’, 역서로 ‘당신이 원하는 친구가 되는 법’등이 있다. 최근 논문으로는 생태계 위기를 인간 성격의 본질 측면에서 고찰한 ‘심리생태계와 동반성장’ 등이 있다.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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