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림 시인
아침 일찍 여주에 왔습니다. 영릉(英陵). 세종대왕을 뵈러 왔습니다. 세상은 시끄러운데 이곳은 적막하기 그지없습니다. 간간이 일어나는 솔바람소리가 제일 큰 소리입니다. 겨우 매달려 있던 나뭇잎들이 하염없이 지고 있습니다. 솔잎도 하릴없이 떨어져 쌓입니다. 가을과 겨울이 평화롭게 자리를 바꾸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새벽녘에 겨우 잠이 드셨을 대왕의 침소(寢所)를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무엄하게 기침소리도 몇 번 내봅니다. 머리를 조아리며 나직하게 여쭤봅니다. "전하, 얼마나 마음이 아프십니까?" 부질없는 질문입니다. 나라가 편치 않은데 당신 같은 성군(聖君)의 심사가 편하실 리가 없지요. 밤마다 촛불을 밝혀들고 당신의 동상 곁으로 구름처럼 모여드는 백성들, 소망의 외침을 여기서도 다 듣고 계실 것입니다. 여기뿐이겠습니까. 전국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당신은 이땅의 미래를 걱정하고 계실 테지요. 아울러 지폐 속 당신의 초상(肖像)을 바라보는 얼굴마다 웃음꽃이 피어나기를, 당신의 문자로 읽고 쓰고 배우는 모든 이들의 꿈꾸는 세상이 어서 열리길 기다리실 것입니다. 그것이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행복을 책임진 자리에 앉은 이의 마음이지요. 그래서 지금 이 나라 사람들은 당신을 에워싸고 희망의 노래를 부릅니다.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우리 모두가 원하는 나라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세종시에서 남극의 세종기지까지 한 뜻이겠지요.
각설하고, 제가 평일 아침나절에 여기 와 망중한(忙中閑)에 든 연유를 여쭙겠습니다. 제 수업을 듣는 몇 학생들의 과제 덕분입니다. 그들이 내민 작품의 메시지를 보는 순간,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습니다. 동시에, 이곳이 떠오르더군요. 그들은 '한글의 가치를 더욱 드높이기 위한 캠페인 아이디어를 내보라'는 선생의 요구를 보기 좋게 만족시켰습니다. 소재부터 신선했습니다. 그들은 광화문 촛불 시위 현장에서 화제를 찾아냈습니다. 대왕의 동상을 중심으로 갖가지 표어가 적힌 팻말을 들고 있는 군중들에게서 '한글'의 가치를 읽었다는 것이 자못 대견스럽기까지 했지요. 학생 하나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엊그제 광화문에 갔다가 이 사진을 찍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이야말로 한글의 위대함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세종대왕께서도 말할 수 없이 행복해 하셨을 것입니다. 너무나 흐뭇하셔서 눈물을 글썽이셨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속으론 몹시 반가우면서도 짐짓 모르는 체 하며 질문을 던졌습니다. "시위 광경을 보고 세종대왕이 흐뭇해하실 거라고? 왜?" 학생은 조금 더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훈민정음 서문(序文)을 생각해보세요.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 싶은 바가 있어도 제 뜻을 펼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셨다고 밝히셨잖아요." 어서 결론을 듣고 싶어서 채근을 했습니다. "그래서?" 학생은 신이 나서 받았습니다. "대왕께서 한글을 만들지 않으셨다면 저 많은 팻말의 주장과 외침들이 어떻게 가능했겠어요? 국민들이 억울하고 답답한 가슴 속 응어리들을 무엇으로 저렇게 쉽게 표현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순간, 저도 한껏 행복해져서 외쳤습니다. "훌륭한 발견이야! 요즘 우리 시위문화에 대한 온갖 해석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방송국 앵커도, 신문사 논설위원도 그런 가치는 찾아내지 못했어. 광장 한복판에 세종대왕을 모셔놓고도 그분의 마음을 읽어볼 생각은 아무도 안했어." 저는 요즘 말로 '격하게' 그들을 칭찬했습니다. 동시에, 지체 없이 당신을 찾아뵙고 이 젊은이들의 기특한 소견을 자랑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의 절을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왕이시여, 과연 보고 계시는지요? 당신이 지으신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가 '바른 나라를 향한 뜨거운 격문(檄文)'으로 천지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이제 이땅의 백성들은 돌을 던지지 않습니다. 화염병에 불을 붙이지도 않습니다. 자신들의 손으로 또박또박 눌러 쓴 한 글자 한 글자가 돌멩이보다 더 단단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난 한마디 한마디가 칼보다 매섭고 화살보다 독하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저희들에게 참으로 엄청난 힘을 주셨습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뜻을 드러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과학적인 문자, 한글. 지구 위의 어느 조상이 후손들에게 이만한 선물을 했을까요. 또 다른 한 팀의 과제는 당신을 이렇게 예찬하고 있습니다. "세종대왕 당신은 5000만의 산타클로스입니다." 사진이 재미있더군요. 광화문에 계신 당신의 머리에 빨간 털모자가 씌워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문득, 이렇게 외치고 싶어집니다. "세종대왕 만세. 한글의 나라 만세." 윤제림 시인[아시아경제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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