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단지 놀이터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이 쑥덕인다. 보아하니 '초딩'들이고 듣자하니 '최순실' 얘기다. 여자 아이 셋, 남자 아이 하나. 최순실이 어쩌구 저쩌구, 대통령이 어쨌네 저쨌네. 이런 맹랑한 녀석들. 요즘 아이들이 조숙하다지만 배경은 뻔하다. TV고 인터넷이고 연일 쏟아지는 뉴스가 저들이라고 왜 궁금하지 않겠나. 그 뉴스를 보면서 한숨을 토해내는 부모가 왜 걱정되지 않겠나. 엊그제 저녁 동네 식당에서도 비슷한 광경을 목도했다. TV '속보'에 정신이 팔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문득 옆 테이블 대화에 솔깃해졌다. 초등학생 아이가 TV에 시선을 꽂은 채 이렇게 물었다. "엄마, 퇴진이 뭐야?"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엄마가 아이 숟가락에 반찬을 얹어주면서 대답을 시리즈로 쏟아냈다. 큰 잘못을 저질러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라며 1절, 그 잘못 때문에 국민들이 화가 났다며 2절, 화가 난 국민들이 광화문에서 촛불 시위를 한다며 3절. 옆에 있던 아이 아빠가 거들었다. "우리 다음주에 광화문에 갈까?"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어른들도 모자라 이제는 아이들까지 나라 걱정이다. 세상물정을 몰라도 될 나이에 이미 조숙해버렸다. 사회를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대단하다. 정치 냉소주의를 일거에 해소시킨 '그분'의 역설적 쾌거. 어쩌면 그분은 우리 아이들의 시민의식을 배양하겠다는 새마을운동급의 일념으로 나라 꼴을 이 모양으로 만든 것이라고 능히 짐작해본다. 그분의 유체이탈식 성품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믿거나 말거나, 또 다른 쾌거가 있다. '옛날 헬-조선에 닭씨 성을 가진 공주가 살았는데 닭과 비슷한 지력을 가졌다'로 시작되는 연세대생의 <공주전>은 고통과 분노를 넘어 상실감과 허탈감에 처했을 때 비로소 예술의 정수(精髓)에 다다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근혜가결국 해내시어타 나라골이참 잘도라간다 이정도일준 예상모택다…'는 고려대생의 <박공주헌정시>는 신랄함의 극치를 뽐내다못해 우리를 발작하게 만든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풍자의 대가'인 다리오 포도 울고 갈 학생들의 걸작을 그분이 봤을리 없지만, 혹 봤더라도 그 특유의 말투로 '그,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그'라는 '소리'만 겨우 내뱉었을 것이다.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 저 소리를 해독하면 '지금의 수난과 고통은 학생들의 창작력을 북돋아 훗날 노벨문학상 수상의 토양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기도 안차는 결과물이 나온다.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분을 통해 '인내심'의 가치를 깨닫는다. 돌아가는 판세를 보니 작금의 혼란이 쉬 가라앉지 않을 본새다. 그분은 결코 '계두(鷄頭)'가 아닐텐데 얼마 전 울먹이며 읽어내린 반성문을 벌써 잊어버린 것 같다.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줄 뜻도 없어 보인다. 그 바람에 친구와 연인과 가족들은 언 손 비벼가며, 서로를 껴안아가며 주말마다 촛불을 들어올려야 한다. '빽' 없고 힘 없는 서민들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곤 이 악물고 견디며 버티는 인내심 뿐이다. "재능보다 훈련, 열정, 행운이 우선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내심이다"는 제임스 볼드윈의 말처럼. "불굴의 용기와 인내심을 갖춘 인간은 어떤 위기가 닥쳐도 견뎌낼 수 있다"는 부처의 가르침처럼. 권력은 10년을 못 가고(權不十年), 화려한 꽃도 십일을 넘기지 못한다(花無十日紅). 결국은 국민이 이긴다.이정일 산업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
ⓒ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