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철 교수
엊저녁 뒤늦게 중2병을 앓고 있는 중3 딸과 영화를 보러 갔다. 예전엔 아빠랑 데이트 하자면 헤벌쭉 따라오던 아이가 이제 심드렁한 표정으로 ‘뭐 볼 건데?’라며 섭섭한 멘트를 던진다. ‘진짜 좋은 영화가 나왔는데 아빠랑 같이 보자(제발!)’선심 쓰듯 따라 나온 딸과 함께 본 영화는 최근 개봉한 영화 ‘자백’. 뉴스타파의 최승호 피디(이제 감독이라는 타이틀도 어색하지 않다)가 만든 국가정보원 간첩조작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호러 영화를 보고 싶다는 딸을 살살 꾀어 팝콘을 들려 자리에 앉혔다. 자백. 원래 자신이 지은 허물이나 죄를 스스로 밝힐 때 쓰는 말이다. 스스로 자(自)에 흰 백(白)을 쓰는 이유는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고백하면 죄를 씻고 하얗게 된다는 뜻이리라. 역설적으로 영화에 나오는 조작사건의 피해자들은 국정원의 겁박과 고문으로 거짓 죄를 인정해 스스로를 검게 만든다. 검은 죄를 씻고 하얗게 되는 자백이 아니라 오히려 죄 없는 사람들을 검게 물들이는 자백(이라고 쓰고 억지로 죄를 뒤집어썼다고 읽는다)이다. 한번 새겨진 검은 기억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40년이 지나 무죄판결을 받고 환하게 웃던 재일교포유학생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이철. 아들의 검거소식을 전해 듣고 충격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울먹인다. 그 자신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인 53세가 되던 때, 삼년 후 돌아가신 어머니의 나이 56세가 되었을 때 자신 때문에 부모를 일찍 보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모진 고문으로 정신분열 증세를 보였지만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7년 간 감옥에 방치되었던 김승효는 일본으로 돌아가 과거를 가슴에 묻고 세상과 불화했다. 헝클어진 흰 머리와 아무렇게 자란 수염은 찬란했던 시절 일순간에 송두리째 뽑혀 떠다닌 그의 일생과 닮아 있다. 그가 경험한 1970년대 대한민국은 그의 말대로 ‘나쁜 나라’였다. 차라리 잊고 싶은 과거의 어두운 기억은 그를 오늘도 괴롭히는데 몸과 영혼에 새겨진 고통의 기억은 도무지 지워지지 않았다. 영화에 등장하는 반대 쪽 인물들은 하나같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국제선 탑승대기실에서 운명적으로(?) 최승호 감독을 맞닥뜨린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김기춘 역시 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가해자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고 피해자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번드르한 단정함 뒤에 깃든 김기춘의 영혼없는 부정에서 일종의 시대적 비겁함을 엿본다. 반면 풀린 눈으로 자신이 겪은 야만의 시간을 증언하는 김승효는 실낱같이 위태로운 생을 버티고 견뎌온 사람이 보여주는 어떤 고결함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