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뱃돈의 재발견]세뱃돈, 중국보다 천년이나 늦은 이유는?

뿌리깊은 화폐에 대한 불신조선 건국 과정에서 나타난 강제적 화폐개혁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한국과 중국의 세뱃돈 문화는 그 출발시점이 900~1000년 정도 차이가 난다. 일본과 비교해도 300년가량 뒤진다. 이미 10~11세기 화폐경제가 정착된 이후 세뱃돈을 주고받은 중국과 17세기 에도막부(江戶幕府)시대 이후 세뱃돈 문화가 시작된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20세기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세뱃돈 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세뱃돈을 주고 받는다는 것은 화폐 발행 및 유통량이 많아 민간에서도 활발하게 돈이 오고갔다는 증거다. 중국은 북송(北宋)시대인 서기 997년에 이미 동전 발행량이 8억개를 넘어섰다. 지난 2014년 한국은행의 동전 발행량인 7억5453만개를 넘는 수치다. 화폐 경제가 발전하면서 11세기 초엽에 중국은 지폐가 등장했다.그러나 우리나라는 동아시아 삼국 중에서도 화폐 경제의 정착이 늦었다. 금과 은같이 본위화폐가 될만한 귀금속 생산량이 많지 않았고 대내외 교역량도 크지 않았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민중들이 화폐에 대해 깊은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화폐에 대한 불신은 여말선초 조선 건국과정에서 나타난 저화(楮貨)의 발행과 함께 시작됐다. 고려사(高麗史) 등 사서에 따르면 저화는 닥나무 껍질로 만든 지폐로 고려 멸망 1년 전인 서기 1391년 발행됐다. 이성계 일파를 비롯한 조선건국 주도세력은 신왕조 창건을 위한 재정기반 마련 및 기존 고려 권문세족들의 재력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금·은·포화(布貨)를 거둬들이고 저화와 바꾸게했다. 그리고 이듬해 고려가 멸망, 조선이 건국되면서 저화는 자동 소각됐다. 이후 조선 조정은 1401년 저화를 재발행, 저화 1장에 쌀 2말이라는 고정가치를 부여했으나 시장에서 저화의 가치는 계속 하락했다. 조정에서 언제 또 멋대로 소각시킬지 모르는 화폐가 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불가능했다. 저화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1423년 보조 화폐로 동전(銅錢)인 조선통보가 발행됐지만 두 화폐 모두 시장에서 외면받았다. 시장에서는 오히려 삼베, 무명, 모시, 면주 등 물품화폐로 쓰인 직물인 포화(布貨)가 유통됐다. 이에 조선조정은 1425년 포화의 사용을 금지하고 조선통보를 사용할 것을 강제했으나 시장의 강력한 반발로 이듬해 다시 포화의 사용을 허용했다.
화폐정책은 이후에도 계속 우여곡절을 겪으며 시장의 불신을 높였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중국과 일본을 통해 대량의 은이 유입되고 동아시아 내에서 구리 유입이 활발해지면서 우리가 흔히 엽전이라고 부르는 상평통보(常平通寶)가 유통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잦은 인플레이션과 위폐 등장, 시중 유통 동전이 급감하는 전황(錢荒)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면서 상평통보는 폐지와 재발행을 이어갔고 시장에서 안정적 가치를 부여받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화폐에 대한 불신에 쐐기를 박은 것은 당백전(當百錢)의 발행이었다. 1866년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경복궁 중건을 위해 대량의 당백전을 발행하면서 화폐가치가 급락했다. 실제 가치가 상평통보의 5~6배밖에 인정받지 못한 당백전을 상평통보의 100배 가격으로 유통시키면서 시장의 저항이 속출했다. 이런 상황에서 상업 발전에 따라 자연스럽게 화폐경제가 정착된 중국이나 일본보다 우리나라는 세뱃돈 문화가 늦게 정착될 수밖에 없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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