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백우진 기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明) 정복 야욕은 헛된 꿈이었고 ‘이몽’(異夢)이었다. 우선 히데요시의 심복 무장으로 조선 침공의 선봉장을 맡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조차 이 꿈을 믿지 않았다. 이런 측면에서 ‘명 정복’은 ‘이몽’이었다. 또 히데요시의 야심은 명 황제에게는 전달조차 되지 않았다. 명 만력제(萬曆帝)는 히데요시가 일왕에 책봉되기를 원한다는, 전혀 딴판인 보고를 받았다. 이 점에서도 히데요시의 꿈은 ‘이몽’이었다.
강화 협상을 하는 고니시 유키나가(왼쪽)와 심유경. 사진=KBS 드라마 '징비록'
만력제는 자신이 보고받은 바에 따라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국서를 보냈다. 명 국서에 히데요시가 요구한 7개조에 대한 답은 하나도 없었다. 앞서 히데요시는 ▲명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궁으로 보낼 것 ▲조선 팔도 중 4개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중단된 명과 일본 사이의 감합무역(勘合貿易)을 재개할 것 등 7가지를 강화조건으로 제시했었다. 감합무역은 중국과 주변국의 조공무역을 가리킨다. 일본에서는 상업활동이 활발했고, 중국과의 조공무역은 큰 경제적 이익을 거둘 수 있는 사업이었다. 히데요시의 야심이 왜 만력제에게 전해지지 않았을까. 만력제는 어떻게 해서 왜곡된 보고를 받게 됐을까. 히데요시와 만력제 사이에서 정보를 조작한 핵심 인물이 일본의 고니시와 명의 유격장군 심유경(沈惟敬)이다. 고니시는 전쟁과 정복보다는 명나라와 교역을 재개해 실리를 취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고니시는 임진왜란 발발 전인 1592년 1월 조선에 부하를 보내 다음과 같은 뜻을 전한 바 있다. “우리 부대가 선봉이니, 그들을 한양에 머물게 하고 명과의 교섭을 주선해 달라. 명과의 교역이 시작되면 히데요시를 설득할 수도 있다.”고니시는 평양 입성 전에도 사자 보내 선조와 알현을 요청했지만 이미 선조가 의주로 피신한 뒤였다. 심유경은 명 원군 지도부와 마찬가지로 일본군을 꼭 격퇴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명나라는 일본이 조선을 지나 자국을 침범할 지경이 되자 원군을 파병했을 뿐이었다. 명 원군은 그래서 1593년 평양성ㆍ벽제관 전투 외에는 일본군과 크게 맞붙어 싸우지 않았다. 심유경은 1592년 9월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에게 강화 협상을 제안했다. 고니시가 이에 대해 답변한 것은 평양성ㆍ벽제관 전투를 거친 이듬해에 이르러서였다. 고니시는 “화평을 성사시키려면 히데요시가 체면을 유지하면서 전쟁을 포기할 수 있도록 하는 방도가 필요하다”며 “베이징에서 사신들을 파견해 과거 일본과 중국 간에 행하던 교역을 다시 일본인들에게 허가하도록 하는 것”을 제안했다. 심유경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1593년 고니시 등과 함께 일본에 가서 히데요시를 만난다. 히데요시가 ‘조선 4도 일본 할양’ 등 7개조를 요구한 게 이 자리에서다. 고니시는 7개조를 들으며 ‘이 중에 심유경에게 부탁한 것은 무역뿐인데’라고 생각하며 난감해했다. 강화 7개조는 명 조정에 보고될 때는 전혀 다른 것으로 위조됐다.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가짜 국서가 상신됐다. 이 국서는 고니시와 심유경이 짜고 위조한 것이었다. 명 조정에서는 가짜 국서를 그대로 믿고 책봉사를 일본에 파견했다. 명 책봉사는 1596년 9월 오사카성에서 히데요시와 회견했다. 자신의 요구와 딴판인 명 국서를 본 히데요시는 분통을 터뜨렸다. 히데요시의 허황된 꿈은 이렇게 해서 깨졌다. 명과 일본의 4년에 걸친 장기 강화협상도 결렬됐다. 히데요시의 지시에 따라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했다. (자료)사카이야 다이치,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야북스송복,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 시루루이스 프로이스, 임진난의 기록, 살림백우진 기자 cobalt100@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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