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학 서울대 행정연구소 특별연구원
일본 닛코시 산악지역 바로 밑 너른 평지에 동조궁이라는 사당이 자리를 잡고 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그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신 곳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 사당 앞에는 어른 두 명이서야 둘러쌀 수 있는 굵기의 전나무가 울창하다. 임진왜란에서부터 우리나라의 굴곡진 역사가 대부분 일본으로부터 비롯됐음에도 그동안 일본은 이렇게 평탄했구나하는 생각에 속이 쓰린 기분을 떨치기란 어렵다. 원전사고를 겪은 지금은 물론 지도에 방사능 오염지역으로 짙게 표시돼 있지만 말이다. 그 전나무가 자라는 동안 이 땅은 왕조가 교체되는 대신에 허약한 왕들을 앞세운 사대부의 나라가 됐다. 공동체가 아니라 가문만 생각하는 유생들의 문약함은 일본강점기에 기회주의적인 행태로 나타났고 오늘날에도 노블리스만 밝히고 오블리제는 외면하는 권력층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세태는 을사늑약 이후 극명하게 드러난다. 나라를 빼앗기고도 벼슬아치니 양반네가 왜적에 붙는 현실이었다. 오죽하면 매천 황현 같은 이는 인간 세상에 식자 노릇하기 어렵구나라는 절명시와 함께 "내가 죽어야 할 의무는 없지만 나라가 선비를 기른 지 500년이 돼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죽는 사람이 없어서야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하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을 하였을까. 하지만 우리가 우러를 선각은 있었다. 진보주의자들을 민족의 개념으로부터 놓아주지 못하는, 이렇게 안쓰러운 역사나마, 민족을 위해 아나키스트가 된 단재 신채호, 우당 이회영과 같은 분들이 있어 지금까지 명맥이 이어진 것이다. 이덕일의 <이회영과 젊은 그들> <근대를 말하다>에 잘 나와 있듯이 명문가문의 우당과 그의 형제들은 만주로 집단 망명하면서 지금 가치로 환산해 수백억에 달하는 전 재산을 들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에 바쳤고, 손수 친 난을 팔아 무기를 살 독립자금을 마련했다 한다. 선생을 포함해 다섯 형제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사하거나 극심한 상황에서 병사했고 오직 다섯 번째 이시영 선생만이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와 이승만 정부의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우당이 옥사한 1930년대는 중국인과 연합한 조선인의 항일조직이 일본군과 게릴라전을 펼쳤던 시기다. 이에 대응해 일본군은 간도특설대를 앞세워 독립군 토벌에 나선다. 간도특설대의 사병은 모두 조선인이었고, 장교는 일본인과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항일운동을 하는 조선 청년들에 대해 무자비한 진압의 총구를 겨누었다. 윤봉길 의사가 폭사시킨 일본 육군 대장의 이름을 따 시라카와 요시노리로 창씨개명한 간도특설대의 장교 출신 백선엽은 훗날 이에 대해 "우리가 진지하게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들이 역으로 게릴라가 돼 싸웠으면 독립이 빨라졌으리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고 눙치려 한다. 우당은 그렇다면 이 암울한 시기를 어떻게 극복하였는가. 김좌진의 친척동생 김종진과의 대화에서 "확고한 자각과 목적의식이 투철한 사람들이 하는 독립운동은 운동 자체가 해방과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독립운동의 과정이 그 결과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설파했다. 실제 역사를 살아온 한 위인에 대한 존경과 더불어 신자유주의가 뒤덮어 어둑어둑한 하늘 아래에서 왜소해지는 개개인이 이 시대를 사는 의미 역시 곱씹어볼 계기라 할 것이다. 을사늑약이 이뤄졌던 옛 덕수궁 자리 중명전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아직도 떠도는 원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회영과 6형제'라는 주제로 전시회가 열린다. 오는 3월1일, 일요일까지뿐이니 얼마 남지 않았다. 몰랐거나 미뤄뒀던 이들은 서두를 일이다.김환학 서울대 행정연구소 특별연구원<ⓒ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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