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백우진 기자] 미국 소재 의류 회사가 미국에서 생산된 데님을 미국산 실로 바느질하고 미제 지퍼를 부착해 청바지를 만들어 판매한다고 하자. 이 회사는 뒷 호주머니를 부착하는 리벳 몇 개만 수입해 썼다. 이 회사가 이 청바지에 ‘메이드 인 USA'(Made in USA) 라벨을 부착할 수 있을까? 즉, 원산지 표시 규정을 위반했다는 소송에 휘말리지 않을까?
미국산이라고 명기된 의류회사 갭의 청바지. 갭은 이 기사와 직접 관련은 없다. 사진=블룸버그
리벳 같은 작은 부품 몇 개 때문에 미국산에 미국산이라고 쓰지 못하는, 미국산이라고 표시했다가 제소되고 패소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고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다. 미국 내 제조업을 보호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제도가 오히려 미국에 남아 미국인을 고용해 공장을 돌리는 업체에 족쇄가 된 것이다. ◆리벳 하나만 써도 미국산 아냐= 미국에서 원산지규정이 가장 까다로운 곳이 캘리포니아주다. 여기서는 대형 제품에 리벳 하나라도 외국에서 들여온 것을 썼다면 메이드 인 USA라고 표시하지 못한다. WSJ는 유타주 클리블랜드에서 농구 골대 후프를 제조하는 라이프타임을 단적인 사례로 소개했다. 라이프타임은 거의 모든 부품을 자체 공장에서 자르고 모양을 만들고 칠하고 조립해서 만든다. 부품 중 볼트와 너트 몇 개만 중국에서 수입한다. 라이프타임은 캘리포니아에서 이 볼트ㆍ너트 몇 개 때문에 미국산이라는 표기가 옳지 않다는 소송에 걸렸다. 또 이 회사의 대형 후프는 독일산 완충장치가 들어갔기 때문에 미국산 표시가 거짓이라는 소송을 당했다. 두 소송은 집단소송 한 건으로 병합됐고 라이프타임은 지난 봄 샌디에이고 소재 캘리포니아 주법원에서 원고 측 변호사에게 48만5000달러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또 사회사업으로 32만5000달러를 기부하기로 했다. 미국산이라고 속아서 후프를 구매한 소비자들에게 구매가와 할인한 금액과의 차액을 돌려주기로 했다. 소송의 두 원고에게는 각각 4500달러와 3500달러를 지급했다. 이와 별도로 라이프타임은 소송비용으로 53만5000달러를 치렀다. 맥 인스트루먼츠는 외국산 작은 고무 고리와 전구를 넣은 맥 라이트 손전등을 미국산이라고 표시했다고 제소됐다. 어린이 파티용 헬륨 탱크 제조업체는 고객에게 보내는 포장에 수입 풍선을 넣었다는 이유로 소송에 걸렸다. 이밖에 문 자물쇠ㆍ수공구 제조업체도 제소됐다. ◆미국산이 90%여도 표시 못해= 이런 엄격한 미국산 표시 금지 제도는 1961년에 캘리포니아 의회에서 제정됐다. 값싼 외국산 부품을 잔뜩 넣어 값을 떨어뜨리면서도 미국산이라고 내세우는 업체들로부터 국내에서 생산하는 기업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 제도는 시행된 지 40년 가까이 지나 1990년대 말 기업의 해외이전과 외국 부품 조달이 확대되면서 시비의 빌미가 됐다. 미국에서 제품을 만들면서 모든 부품을 미국에서 구매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게 됐다. 라이프타임의 리처드 헨드릭슨 최고경영자(CEO)는 “우리가 메이드 인 USA라고 쓰지 못한다면 어느 기업이 가능한가”라고 묻는다. 원가 기준으로 이 회사 농구 골대 후프의 90%가 미국에서 만들어진다. 또 이 회사가 농구 골대 후프에 쓰는 볼트ㆍ너트와 완충장치는 미국에서 생산되지 않는다. 라이프타임은 1986년에 설립돼 현재 약 1500명을 고용하고 있다. ◆전문 변호사 강변과 업체 대응= 샌디에이고의 변호사 존 돈볼리는 메이드 인 USA 소송 전문 변호사다. 그는 자신의 웹사이트에 라이프타임 소송을 비롯해 집단소송에서 이긴 건을 올려뒀다. 그는 “고객이 소송 건을 가져온다”고 WSJ에 들려줬다. 그가 최근 겨냥한 업체는 청바지 제조회사다. 그는 “100%를 고수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캘리포니아의 원산지 규정이 힘겹게 국내에서 생산하는 기업에 되레 부담을 지운다는 지적에 대한 변론이다. 호되게 당한 라이프타임은 자사가 생산하는 플라스틱 접이식 의자에는 원산지를 정확하게 표시하게 됐다. 포장 박스에 ‘미국ㆍ외국산 부품으로 생산했다’고 표기했다. 이 의자는 리벳 8개만 빼고는 전부 미국산으로 제조된다.원산지 표시와 관련한 미국 연방무역위원회(FTC) 규정은 뚜렷하지 않다. FTC는 ‘모든, 혹은 거의 모든 부품ㆍ소재가 미국에서 제조됐다면 메이드 인 USA라고 표시할 수 있다’고 허용한다. 이에 따라 어떤 업체는 가치 기준으로 70% 넘게 미국에서 생산했다며 미국산이라고 명기한다. 이런 업체가 바로 돈볼리 변호사가 노리는 먹잇감이다. 백우진 기자 cobalt100@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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