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적 추석 보낸 '명량' 제작진 vs 배설 후손들

'제작·배급사 측 적극적인 해결 노력 아쉬워'

[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

명량, 아바타 제치고 역대 흥행순위 1위[사진제공= CJ엔터테인먼트]

#1. 초등학생 A군은 얼마 전부터 학교에 가기가 싫어졌다. 부모들과 함께 영화 '명량'을 보고 온 같은 반 친구들이 갑자기 A군을 놀려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최악의 악인으로 등장하는 한 장군이 A군의 조상이라는 이유에서다. #2. 최근 군에 입대에 훈련소에 있는 아들을 면회간 B씨는 깜짝 놀랐다. 아들이 고된 훈련이나 억압적인 군대 분위기에 대한 하소연을 할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고참이나 조교, 장교들이 '네가 바로 그 역적의 후손이냐'며 손가락질을 해대고 왕따를 시킨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B씨도 이 영화를 보면서 불쾌하긴 했지만 설마 아들이 그런 고통을 당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3. 경북 한 의대 교수로 재직 중인 C씨는 영화 명량이 개봉된 얼마 후부터 자신의 등 뒤에서 동료들이 "저 선생의 조상이 바로 그 역적이래"라며 수근댄다는 것을 알고 경악했다. 실제 역사에 상상력을 포함시켜 만든 영화라 신경쓰지 않았는데, 의외로 동료들은 왜곡ㆍ과장된 영화 속 묘사를 실제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4. D씨 가족은 최근 온 가족이 함께 영화 명량을 관람한 후부터 부모-자식간 사이가 매우 어색해졌다. 어란 자녀들이 자신의 조상이 영화에서 왜적 보다 더 나쁜 역적으로 묘사되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아 그 후부터 부모와 말을 섞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당황한 D씨와 아내가 "영화와 실제는 다르다"고 아무리 말해줘도 소용이 없었다. 아이들은 어느새 말수가 줄었고, 친구들에게 집안 얘기하기를 꺼려하고 있다. 눈치 챘겠지만, 이들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영화 명량이 이순신 장군에 맞서는 '역적'으로 묘사해 역사 왜곡 논란의 주인공이 된 배설 장군의 후손 '경주 배씨'라는 점이다. 이와 관련 배씨 후손들과 영화 명량 제작진들은 지난 주 매우 대조적인 추석 명절을 보냈다. 우선 배씨 후손들은 올해 추석을 '불행하게' 보내고 말았다. 실제 이들은 경북 성주군에 있는 집성촌 재실에 모여 그동안 겪은 설움을 토로했는데, 영화 명량의 배설 장군 묘사로 인해 받는 심리적 상처가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점이 여실히 확인됐다고 한다. 당초 문중 비상대책위원회가 그동안의 활동 보고와 향후 계획에 대해 토론할 생각으로 마련된 자리였지만, 어느새 모인 후손들이 위 사례들 처럼 명량 상영 후 가종, 학교, 군대, 직장 등 사회생활에서 겪은 왕따ㆍ따돌림ㆍ조롱ㆍ설움 등을 털어 놓는 성토의 자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이들은 지역구 국회의원을 통해 영화 상영 중지 등 국민권익위원회에 접수된 민원이 조속히 처리되도록 하는 한편, 오는 15일 경북 성주경찰서에 찾아가 김한민 감독 등 제작ㆍ배급사 관계자들을 사자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형사 고발하기로 했다. 당초 도포를 입은 문중 어르신들을 서울로 올려 보내 전국민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기자회견을 할 생각이었지만 그동안 아시아경제의 보도 등으로 억울함이 어느 정도 알려졌고 세월호 참사 등으로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사회적 분위기임을 감안해 자제하기로 했다. 이같은 배씨 문중들의 행동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한 두 가지로 압축되고 있다. 우선 영화적 상상력ㆍ창작의 자유 보장 차원에서 배씨 문중들의 상영 중지나 형사 고발 등은 지나치다는 의견이 많다. 반면 철저한 고증을 강조하며 선전에 여념이 없던 영화 제작진들에 대한 비판 의견도 많다. 특히 배설 장군 묘사 부분은 너무 왜곡ㆍ과장이 심했던 만큼 아예 상상의 인물로 하던가 하다 못해 자막을 통해 허구임을 설명하는 등 배려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편 사상 최대의 대박을 터뜨린 명량 제작진들은 그야말로 축하 파티와 두둑한 보너스 등으로 '최고의 추석'을 보냈다. 추석 직전인 지난 3일 관객 1700만명을 돌파하자 제작ㆍ배급사 측은 대대적인 파티를 열어 대기록 수립을 축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제작ㆍ배급사 관계자들은 아시아경제가 배씨 문중의 호소를 보도했지만 아직까지도 감독, 작가 등이 나서는 공식 해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정신적 피해를 호소하는 후손들의 아픔은 아랑곳없이 그들은 막대한 수익을 축하하는 잔치에 바빴다. 심지어 일부 제작진은 첫 보도 후 하루가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전날 축하 파티를 지나치게 즐긴 탓인지 오전 내내 전화를 받지 않는 등 본인들의 경사만 생각하고 남들의 아픔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모습을 보였다. 기껏해야 배급사 관계자를 통해 "영화적 상상력으로 봐달라"는 의례적 멘트를 간접적으로 내놨을 뿐이다. 하기야, 이미 1700만명 관객 돌파라는 전후무후의 기록을 세우고 막대한 수익까지 낸 제작진들이 뭐가 아쉬울 게 있을까. 게다가 배씨 문중이 뒤늦게 낸 국민권익위에 낸 상영 중지 신청이 정식 사법적 조치도 아니고, 실제 실현될 가능성도 희박한 만큼 제작진들은 '그냥 저러다 말겠지'라는 생각을 했을 법도 하다.제작ㆍ배급사 관계자들은 또 배씨 문중의 주장에 대해 "수백년 전 죽은 조상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후손들이 들고 일어나냐, 지금이 조선시대냐"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또 혹시나 법정으로 가더라도 자신들에게 크게 불리할 것 같지는 않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사 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례는 "사자명예훼손은 유족만이 그 구제 절차를 밟을 수 있고, 후손들은 특별한 조치를 취할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국 사람들이 '조상'을 얼마나 중요시하는 지 생각해보면 이들 제작ㆍ배급사 측의 무신경은 '범죄'에 가깝다. '자손이 출세하면 조상을 붓으로 키운다'는 옛말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조상'을 자신의 사회적 지위ㆍ위상과 동일시하면서 업적을 기리고 숭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소설ㆍ영화ㆍ드라마 뿐만 아니라 역사학계의 연구 논문 조차도 분개한 문중들에 의한 시비가 빈번하다. 그만큼 생존 인물을 창작물에서 다룰 때 상처받는 사람들이 생기는 만큼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상태로 볼 때 제작·배급사 측의 적극적인 해결 노력이 없다면, 1700만명 관람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대한민국 대표 영화가 고증에 소홀해 역사 왜곡ㆍ과장 논란에 시달렸다는 '불명예'는 지속될 것이다. 게다가 지금처럼 약자이자 피해자인 배씨 문중들에 대한 냉대를 멈추지 않는다면, 앞으로 사태의 추이는 아무도 모른다. 김봉수 기자 bskim@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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