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보고서 55]2. '살려고 맞은 주사 중독돼서야 아편인거 알았제'

고(故) 김순덕 할머니 작품 '끌려가는 날'.(사진제공=나눔의집)

할머니들 증언으로 재구성한 70여년 전 그날 [아시아경제 김동선 기자, 김보경 기자, 주상돈 기자, 김민영 기자] 일본군 위안부. 영어권에서는 'Comfort Women'으로 불린다. 유엔(UN) 인권위원회는 이들을 '위안부'라고 우회적으로 부르기보다는 '강제 성노예(enforced sex slave)'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게 적절하다고 권고했다. 하지만 정작 피해자들은 두 이름 모두 거부하고 싶어한다. 지난 5월 대구에서 열린 위안부 피해자들을 넋을 위로하는 해원진혼굿 행사 무대에 오른 이용수(86)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위안부가 아닙니다. 저에게는 이름이 있습니다. 부모가 지어주신 이용수라는 이름이 있습니다."평범한 집안의 딸이었던 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잃게 된 건 나라가 온통 혼란에 빠졌던 식민지 시절이다. 영문도 모른 채 타지로 끌려가 위안소에서 참혹한 생활을 했다. 귀국 후의 삶도 평탄치 못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협조를 받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3인의 증언을 토대로 70여년 전 그날을 재구성했다. ◆"양복공장 가면 돈 번다기에 따라갔는데…"=어렸을 때 형편이 아주 징했제. 막 보까리(보릿가루) 죽 먹고, 죽도 못 먹을 때가 많았제. 면태(밀가루 면발)만 사 갖고 끓여먹은 사람도 있고, 그것도 없어서 대두박(콩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을 먹고 그랐제. 나는 일본 학교를 댕겼어. 일본놈들한테 훈련받았제. 그때는 일본이 처녀 공출한다고 야단이었어 아주. 거 때문에 일찍 시집보내고 그랬제. 열일곱 살 먹었을 때 한번은 시장에를 갔는디, 어떤 청년이 그라데. 군인들 양복 맨드는 데 가면은 돈을 겁나게 벌고 편하다고. 그래서 따라갔어. 그래 따라가 버렸어. 군함을 타고 갔는디 며칠이 지났나. 여기가 사세보(佐世保ㆍ일본 규슈(九州) 나가사키현(長崎縣) 북부에 있는 항만도시)라 해. 사람들이 하꼬방(판잣집)서 살드만. 창고 마냥으로 칸칸이 막아 놓고 들어갔다 나왔다 그라드만(다른 할머니들은 이 판잣집은 다다미 네 장(2평) 정도 크기의 칸막이로 돼 있었다고 증언했다). 거기서 뭐 했느냐고? 일은 먼 일을 해, 그런 거 알려고 하지마. 도망? 큰일 나 죽어 블게? 잡히면 즉사하겄드만. 그래서 도망도 못 하고. 지금도 그때가 꿈 속 같아. 내 맘엔 이것이 꿈 속이여, 꿈 속. 악몽 같은 현실을 증언한 박화자(가명) 할머니는 1944년에 취업사기를 당해 일본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고 이듬해 해방이 된 후 귀국했다. 만신창이가 돼 돌아온 딸에게 어머니는 정성껏 보약을 지어줬다. 스무 살에 중매결혼을 했는데 그가 세 아이를 낳았을 무렵 남편은 딴살림을 차리고 집을 나갔다. 아이들이 장성할 때까지 할머니의 피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1992년이 돼서야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에 위안부 피해자 신고를 했다. 고(故) 정서운(1924~2004) 할머니도 비슷한 시기에 피해 신고를 했다. 정 할머니는 9년간 중국, 대만, 싱가포르 등으로 이동하며 위안소 생활을 했다. 아편에 중독되고 자살 시도까지 했다. 다음은 정 할머니의 증언이다. ◆"아편주사, 중독되고 나서야 알았지…죽으려 해도 못 죽고"=방은 쪼깐했어. 야전용 침대 하나 하고 딴 건 암(아무) 것도 없지.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졸병들이 와. 방문 앞에 주루룩 나라비(줄) 서서 나가면 또 들어오고. 저녁 8시 정도 되면 싹 부대로 들어 갔부리거든. 그러다 9시나 10시쯤 되면 그때는 장교들이 와. 장교놈들이 술을 먹고 와 갖고 그 긴 칼 있제, 그 칼을 질질 끌고 댕겨. 지 하잔 대로 안 하면 목이라도 쳐서 죽이겠더라고. 아이구, 말도 마라. 일주일에 한 번씩 야전병원에 성병 검사하러 가거든. 병이 옮았는가 그런 거 보는 거여. 나는 다행히 성병 같은 거에 걸려 본 적이 없었어(할머니들의 증언에 따르면 성병에 걸리면 '606호 주사'를 맞았다고 한다. 할머니들이 '뜨겁고 매우 아팠다'고 증언하는 이 주사는 매독, 회귀열 등에 효과가 있어 많이 사용됐으나 불임의 원인이 되는 등 부작용이 심해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다). 군인들이 삿쿠(콘돔)를 사용했기 때문에. 왜놈들이 지네 몸 하나는 어찌나 철저히 하는지. 남자들 상대 안 하려구 발악했지만 어쩔 수 없이 남자를 받았는데 피가 죽죽 나구 목욕간도 못 갔어. '나 좀 살려 달라' 하니까 살려 준다면서 그때부터 아편을 놓아주는 기라. 그 뒤 아편을 맞고 나면 아픈 데도 모른기라, 상대를 해도. 아편 주사라는 건 중독이 될 때야 알았지. 하루 한 번 주던 게 아침에 주고 저녁에 주고 그러는디 이제 주사를 안 주면 아이고 맞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드라고.

권윤덕 작가의 그림책 '꽃할머니' 중 위안소 기록도.(그림제공=사계절 출판사)

그때는 사는 게 싫었어. 군의관으로 있던 한국 사람한테 부탁해서 말라리아 걸렸을 때 먹는 약을 한 번에 세 알도 얻고 네 알도 얻고 한 사십 알을 모았다가 털어 넣은 기라. 난중에 알았는데 밑으로 코로 입으로 전부 피가 터져 나와서 이틀 만에 깨어났다 하더라. 죽으려고 그래도 죽지도 못하구 산 기라. 난중에는 결심을 했다 아이가. 이 정신으로 어떻게 되더라도 살아야지, 그래야 나갈 수 있겠다. 해방 안 됐으면 지금까지 거기서 살았겄제. 위안소에서 인자 고향에 나갈 때는 군표(전쟁 지역에서 쓰인 특별화폐) 주겠다구, 만날 그랬거든. 왜놈들이 손들었단 소리도 우리는 몰랐는데, 어찌 군인들이 안 오는 기다. 그래서 난중에 생각해 보니깐 손든 기다. 정 할머니는 해방 후 약 1년간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하다가 부산행 군함을 타고 귀국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부모는 이미 세상을 떴고, 집은 흉가가 됐다. 결혼을 했지만 아이는 갖지 못하고 남편의 전처가 낳은 아들 둘을 키웠다. 중풍을 앓던 남편 대신 국화빵 장사를 하며 돈을 벌어 공부를 시켰다. 정 할머니는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여성대회에 위안부 피해자 한국대표로 나서 공개 증언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 2004년 별세했다.대부분 몸이 망가져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피해자들은 친자가 아니더라도 내리사랑은 지극정성이었다. 고(故) 문필기(1925~2008)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문 할머니는 동생의 손자를 데려다 자식처럼 키웠다. 다음은 고국으로 돌아온 문 할머니의 이야기다.

경기 광주 '나눔의 집'에 세워진 고(故) 문필기 할머니의 흉상.

 ◆"어머니에게는 공부하고 공장에도 취직했다고 했다"=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밤낮을 걸어서 서울에 도착했다. 기차표를 얻어 고향집에 돌아가니 식구들은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왔다고 깜짝 놀라며 나더러 귀신이 아니냐고 했다. 아버지는 이미 병으로 돌아가셨더라. 어머니는 나를 시집보내려고 성화였으나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가 위안부였는데 누구와 결혼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어머니에게는 내가 위안부였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공부도 하고 공장에도 취직했었다고 말했다. 마음이 괴로워 고향에 돌아온 지 1년 만에 말도 없이 집을 나왔다. 나와서는 진주에 있는 사촌 이모집에 가서 여관 일을 거들어주며 지냈다. 그후 전셋집을 얻어 하숙집, 대폿집 등을 했다. 그때 주위 사람들은 젊은 여자가 대폿집하지 말고 시집을 가라고 했다.서른여섯 살에 철도의 선로꾼을 만나 서울에서 살림을 차렸다. 여덟 살 차이였는데 그와 별로 정분도 없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나도 노동일을 많이 했다. 그는 매일 술을 먹고 내 속을 썩였다. 그는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결혼을 해서 부인과 자식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나를 속인 것이었다. 몇 번을 헤어지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됐다. 결국 그는 병들어 빚만 남기고 죽었다. 현재는 동생의 손자를 데려다 자식처럼 키우고 있다. 내가 외로워서 네 살 때부터 데려다 키웠다. 그리고 새마을 취로사업을 나가 벌어먹고 산다. 또 일거리가 있을 때는 밤에 이웃집에 가서 한 시간에 1000원씩 받고 부업을 했다.문 할머니는 어려운 형편 탓에 아들의 학비와 생활비 걱정이 가장 컸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매주 수요집회에 참석하며 활발한 운동을 벌여 2000년 국제인권변호인단이 수여한 인권상을 받았다. 2003년부터 '나눔의 집'에서 생활한 문 할머니는 늘 온화한 성격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할머니의 싸움은 자나깨나 계속됐다. 가끔 일본군과 싸우는 악몽을 꾸면서 소리를 내지르곤 했다. 병상에 누워 있던 2007년에는 미국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 통과를 위해 영상 증언을 펼쳤다. 문 할머니는 생전에 "우리 ○○(아들)이 없었으면 못 살았을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굴곡진 삶을 버틸 한 가닥 희망이었던 것이다.◈기획 시리즈 진행 중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1명이 공식 인정돼 시리즈 제목을 '위안부 보고서 54'에서 '위안부 보고서 55'로 바꿉니다. 김동선 기자 matthew@asiae.co.kr김보경 기자 bkly477@asiae.co.kr주상돈 기자 don@asiae.co.kr김민영 기자 argu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기획취재팀 김동선 기자 matthew@asiae.co.kr기획취재팀 김보경 기자 bkly477@asiae.co.kr기획취재팀 주상돈 기자 don@asiae.co.kr기획취재팀 김민영 기자 argus@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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