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日野話]7살짜리가 지은 시 한편(61)

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61)
이지번과 이지함, 그리고 명월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산해도 웃으며 동의를 표시했다. 이들은 10분쯤 강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 왼쪽 강변으로 들어가 측백나무가 숲을 이룬 절벽 쪽으로 향한다. 그 절벽을 돌아 오르면 무지개 모양을 한 돌문이 있다. 바위에 구멍이 뻥 뚫린 형상이다. 원래 석회동굴이었던 입구가 붕괴되면서 생겨난 듯하다(이런 형상으로는 동양 최대라고 한다).  퇴계는 석문(石門)을 보고 그 절경에 반했으며, 단양 최고의 명물로 꼽기도 했다. 석문 왼쪽 아래에는 작은 굴이 하나 있는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구획정리를 해놓은 논두렁 같은 암석에 물이 담겨져 있어 기이한 느낌이 난다. 이를 선인옥전(仙人沃田ㆍ신선이 경작하는 비옥한 밭)이라 부른다. 옛날 마고할미가 잃어버린 비녀를 찾으려고 석문 아래 바위를 긴 손톱으로 마구 파헤쳤는데 이때 아흔아홉 마지기의 돌밭이 만들어 졌다는 전설이 있다. 이 밭에서는 선인(仙人)들이 농사를 지어 하늘의 양식으로 썼다고 한다. 마고할미는 술과 담배,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며 살다가 죽어서 바위가 되었는데, 석문에는 긴 담뱃대를 물고 술병을 들고 있는 형상의 마고할미 바위가 있다. 또 석문 위쪽에는 자라를 빼닮은 바위 하나가 있어 눈길을 잡는다. 석문을 노래한 시인은 19세기 추사 김정희다. 그의 시를 즐기면서 올라가자.  百尺石霓開曲灣(백척석예개곡만) 神工千佛杳難攀(신공천결묘난반) 不敎車馬通來跡(불교거마통래적) 只有煙霞自往還(지유연하자왕환)  백 척 높이 돌무지개가 물굽이를 열었으니  신이 빚어낸 천 개의 부처, 오르는 길 아득하네 수레가 오갈 자취를 허락하지 않으니 다만 안개만이 오갈 뿐이네 추사는 석문에 오르는 길의 험준함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 같다. 옛사람들은 석문을 도인과 부처가 나오는 문으로 인식했기에 귀하게 여겼다. 그 문에 오르는 길은 수행과 다름없다. 석문에 올라 그 아치형 프레임에 담긴 도담삼봉을 내려다보는 맛도 인상적이다. 추사는 백 척이라 했으나, 과장이고 수십척의 높이이다. 그러면 이번에 석문의 경치를 명명할 이산해(李山海ㆍ1539~1609)는 어떤 사람인가. 구담에 은거한 이지번의 아들이며, 또 이지함의 조카이다. 고려 말 목은 이색의 7대손이기도 하다. 산해라는 이름을 짓게 된 사연이 전해 내려온다. 그의 아버지는 어느 날 만리장성 동쪽 끝에 있는 숙소 산해관에서 잠을 자는 꿈을 꾸었다. 마침 이지번의 아내도 똑같은 꿈을 꾸었는데 그 뒤에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산해(山海)로 하였다.  
산해는 당시 장안에 소문난 신동이었다. 돌이 지나면서 문자를 깨우치기 시작했다. 한 노인이 어깨에 멘 쇠스랑을 보고 "저건 산(山)자다"라고 말했다. 다섯 살 때, 벽에 붙은 고산 황기로의 초서를 보고 손가락으로 흉내를 내기에 먹과 종이를 줬더니 거의 비슷하게 글씨를 썼다. 병풍에 쓴 글씨를 보고 어른들이 깜짝 놀랐다. 숙부인 이지함이 태극도(太極圖)를 가르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금방 천지음양(天地陰陽)의 이치를 이해했고 숙부에게 그림과 관련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밥 먹는 것을 소홀히 하기에 이지함은 밥을 기다리는 동안 운자(韻字)을 불러주고 시를 짓게 하였다. 그랬더니 7세짜리가 이런 시를 지어왔다.  食遲猶悶況學遲(식지유민황학지)어늘  腹肌猶悶況心肌(복기유민황심기)리요 家貧惟有療心藥(가빈유유료심약)하니  須待靈臺月出時(수대영대월출시)라  밥이 더뎌도 걱정인데 하물며 공부가 더디면 어떻겠는가 배가 고파도 걱정인데 하물며 마음이 고프면 어떻겠는가 집이 가난해도 마음을 치료할 약은 있으니 모름지기 영대(신령스러운 집, 즉 마음)에 달 뜨기를 기다려라  <계속>▶이전회차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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