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조강욱 기자] 전 세계에서 연구개발(R&D)에 가장 많이 투자하는 기업은 어디일까? 삼성전자(2위), 마이크로소프트(MS·3위) 등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도, 노바티스(7위)와 같은 다국적제약회사도 아닌 독일의 폴크스바겐이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제조업 중심 경제구조를 가진 독일은 유럽 전체 제조업 부가가치의 30%를 차지하며 세계시장 수출 점유율도 세계 3위에 이른다. 특히 독일은 유럽 주요국들이 금융위기에 흔들리던 시기에도 든든한 제조업 기반을 바탕으로 유일하게 건재함을 과시했다. 최근 우리나라의 제조업이 위기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이처럼 세계 시장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는 독일의 제조업 비결을 배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25일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보고서를 통해 독일 제조업의 경쟁력 비결을 ▲R&D 지속 투자 ▲높은 노동생산성 ▲기술인재 양성 ▲장기적 성과 추구 ▲기술선도로 신시장 창조 등 5가지로 꼽았다.◆경기와 무관한 R&D 지속 투자= 2012년 기준 R&D 투자순위로 본 글로벌 500대 기업 리스트에는 독일기업 41개가 이름을 올린 반면, 한국은 13개에 그쳤다. 매출액 대비 R&D 비중도 독일(6.5%)이 한국(3.1%)의 2배를 넘어섰다. 독일의 R&D 경쟁력은 국가 전역에 구축된 300여개의 산업클러스터를 통해 강화된다. 정부는 클러스터 설립의 밑그림을 그리고 이후에는 기업중심의 강력한 산학연 네트워크를 통해 자생적인 선순환 구조가 정립돼 왔다는 설명이다. 실제 세계 R&D 투자 1위 기업인 폴크스바겐 그룹의 경우, 1980년부터 시장상황과 관계없이 매년 매출의 5% 이상을 R&D에 투자하는 '5%룰'을 지켜왔다. 이미 1980년대에 중국에 투자 및 현지전략모델을 개발해 중국 시장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또 지역정부와 공동으로 독일 볼프스부르크 지역에 '자동차 비전' 프로젝트를 추진, 부품단지를 조성해 협력업체를 아우르는 새로운 경제 생태계를 성공적으로 구축한 사례로 유명하다. ◆안정적 노사관계를 통한 높은 노동생산성= 국제경영개발원(IMD)의 '2013 세계경쟁력보고서'에 따르면, 독일의 노동생산성은 세계 1위, 노사관계 생산성은 8위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8위, 노사관계 생산성은 56위를 기록했다. 매년 생산성 지수를 발표하고 있는 미국 콘퍼런스보드의 연구에서도, 한국의 시간당 생산성은 32.3달러(30위)로 독일(57.4달러·7위)에 훨씬 뒤질 뿐만 아니라 국가부도 위기를 맞았던 그리스(32.8달러·29위)보다도 낮았다. 안정적인 노사관계는 독일의 높은 노동생산성의 비결로 손꼽힌다. 기업이 고용을 보장하는 대신, 근로자는 근로시간과 임금인상을 양보하는 방식으로 노사 합의에 도달해 왔다. 대표적인 예로 다임러벤츠는 2009년 글로벌금융위기 속, 정리해고를 하지 않는 대신 20억유로의 노동비용을 절감하는 노사협약을 체결했다. 모든 근로자는 노동시간을 8.75% 감소시켰으며, 각종 성과급 및 임금인상 계획을 유보시켰다. 독일 정부가 재계와의 공동작업으로 시간선택제 일자리 확대 등을 포함하는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을 단행한 것도 실업률 증가 없이 금융위기를 넘기는 데에 일조했다. ◆기업경쟁력의 원천, 기술인재 양성= '기술은 마르지 않는 금광과도 같다'라는 독일속담이 있다. 독일에서 기술은 전통과 장인정신의 산물로 역사적, 국가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독일에서는 60%의 중고생들이 학교와 현장이 결합된 형태의 직업교육(Dual System)을 통해 전문기술을 습득한다. 독일의 명품차로 잘 알려져 있는 BMW도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매년 800여명의 인턴을 훈련시키고 있다. 이들은 자동차 개발, 제작, 정비 등 12가지 전문 직무에 따라 기술을 전수받고, 졸업 후에 동 분야에 바로 취업하게 된다. 이 외에 폴크스바겐, 다임러 등 50만개 이상의 대중소기업들도 전문인력 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산업 수요와 일치하는 교육을 제공하는 독일의 시스템은 개인ㆍ기업ㆍ사회에 긍정적인 선순환을 가져오고 있다. 숙련된 기술인력을 기업에 공급하는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청년 실업률을 낮춰 국가경쟁력을 높인다. ◆가족기업 중심으로 장기적 성과 추구= 기업의 평균 수명은 20년을 넘기 힘들고, 30년이 지나면 80%의 기업이 사라진다. 하지만 독일에는 무려 1500개가 넘는 200년 이상의 장수 기업이 존재한다. 이 중 상당수는 우수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세계시장 점유율 1~3위를 기록하며 독일 제조업을 이끌고 있는 강소기업들이다. 장수기업 성공의 이면에는 가족경영기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독일은 전체기업의 95%가 가족기업 형태로 안정적인 기업경영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책임경영과 더불어 근로자 및 지역사회와 높은 유대감을 유지해 온 것이 장점이다. 300년 역사의 머크사 또한 1668년 작은 약국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글로벌 화학원료 및 제약기업으로 성장했다. 13대째 가족구성원들이 회사 경영에 참여하고 있어 긴 안목으로 투자전략을 수립해 왔다. 독일 정부는 가족경영은 부의 대물림이 아닌 장수기업이 많아질 수 있는 한 방법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에 따라, 독일 정부는 2010년 장기간 고용 유지 등 일정 조건만 이행되면 상속세가 부과되지 않도록 상속세법을 개정한 바 있다. 현재 우리나라 상속세 최고세율은 5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약 2배에 달하며, 가업승계 요건이 까다로워 장수가족기업 탄생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강점분야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시장 창조= 독일은 각 제품군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기업들이 유달리 많다. 특정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우량기업이 미국, 일본 등에 비해 4~5배 이상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독일기업은 전통적인 강점분야의 경쟁력을 꾸준히 유지하면서 기술선도로 시장을 조각해 나가는 룰세터(rule-setter)다. 160년의 역사를 가진 지멘스는 전통적인 전자기기 공학 기업이다. 전자부분 기술역량에 집중해 최초의 진공청소기, 인공심장박동기 등 가전제품과 의료기기를 넘나들며 획기적인 전자기기를 개발해 왔다. 기술선도로 시장 자체를 창조하여 진출하지 않은 전자제품분야가 거의 없을 정도이며, 현재 세계적으로 몇 되지 않는 복합기업(conglomerate)으로 분류된다. 지멘스는 독일 민관이 함께 추진하고 있는 제조업 성장전략인 인더스트리 4.0에 발맞추어 이미 스마트 팩토리 개념을 도입해 공정을 고도화하고 있다. 인더스트리 4.0은 제조업에 정보통신기술(ICT)을 접목해 4차 산업혁명을 이루겠다는 제조업성장 청사진이다. 제조업 주도권에서 두세 걸음 경쟁국을 앞서는 독일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유지미 전경련 국제협력팀장은 "미국 제조업이 살아나고 중국의 추격이 턱밑까지 온 가운데 지난해 주요 수출 기업의 영업이익률이 하락하는 등 국내 제조업이 위기에 직면해 있다"며 "늦기 전에 지속적인 R&D 투자와 기술인력 양성 등 독일의 시스템을 벤치마킹해 제조업의 경쟁력을 업그레이드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조강욱 기자 jomarok@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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