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의 사생활-13장 떠나가는 사람들(230)

어쨌거나 이제 긴 연극도 막을 내릴 때가 되었고, 자기 역시 무대에서 내려올 타임이 되었다. 올 때도 혼자였지만 떠날 때도 혼자였다.그로부터 며칠 뒤 오후, 하림이 그곳을 떠나려고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돌아보니 이장 운학이었다. 어쩐지 그가 찾아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차였다. 운학은 이미 한잔 마신 사람 같았는데, 그러고도 손에는 막걸리통이 든 비닐을 무겁게 들고 있었다.“어이, 장선생. 어디 가시려구?”“아, 예. 이제 가야지요.”“서울로....?”“예.”운학은 벌써 그렇게 됐나, 하는 표정으로 하림을 쳐다보았다.“술이나 한잔 하려고 했더니....”말끝을 흐렸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아쉬운 얼굴이었다.“들어오세요.”하림이 말했다.“아니우. 밖이 더 좋아. 구름이 좀 끼긴 했지만.....”그러고는 마당 가 평상 위에 막걸리통이 든 비닐을 던져놓고는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하림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하림은 챙기던 짐을 마저 라면 박스에 담았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먼지 냄새와 함께 깊은 물 속 같이 적막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짐이래야 라면 박스 두 개도 채 되지 않았다. 그래 놓고 밖으로 나오니 운학 이장은 일회용 컵에 막걸리를 따라 놓고 혼자 벌써 몇 잔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 금세 소나기라도 한바탕 퍼부을 기세였다. 그래도 날은 따뜻했고, 바람은 선선했다.“근데 벌써 떠나시우? 글은 다 썼수?”하림을 보자 얼른 새 컵을 꺼내 권하며 운학이 말했다. 제법 친근한 말투였다. “다 쓰고 말고가 있나요. 몸은 좀 어때요?”컵을 받아들며 하림이 위로 삼아 말했다. 그날의 훈장처럼 아직 운학 이장의 이마엔 커다란 피딱지가 눌러 붙어 있었다. 그 모습이 어째 좀 희극적으로 보여서 하림은 공연히 속으로 웃음이 흘러나오려는 걸 참았다. “괜찮수. 내가 몸만 성했어두 그까짓 놈한테 그렇게 맥없이 당하진 않았을 거요.”의족을 한 왼쪽 다리를 들어 보이며 운학이 그래도 큰소리를 쳤다.“최기룡이 그놈도 그날 운이 좋았지 영감 총알이 제대로만 박혔더라면 그놈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요. 영감이 총을 쏘리라고는 정말 몰랐소. 솔직히 말해 나도 깜짝 놀랐다우.”그러고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그나저나 이렇게 훌쩍 떠난다니 꽤나 섭섭하구먼.”하고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하림은 남경희 이야기를 꺼내려다가 말았다. 그 역시 알고 있을테고, 설사 모른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삐닥하게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옆모습이 오늘 따라 유난히 풀이 죽어보였다. 언젠가 바람 불던 밤, 저수지에서 만났을 때와는 아주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하림에겐 오히려 그의 그런 모습이 한편 불쌍해 보이기도 했고, 더 인간적으로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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