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은 어쨌거나 버킹검이었다. 결국은 하림더러 기도원 짓는 일에, 그러니까 미구에 닥쳐올, 위락시설을 앞세운 송사장 무리들과의 일전에 수관 선생 대신 자기네랑 함께 해달라는 요청이 아닌가.계곡길이 거의 끝나고 발아래 아래 그녀의 이층집 지붕이 보였다. 이층집 지붕 너머로 저수지의 번쩍이는 표면이 오후의 햇살을 받아 유리창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한쪽에 벌겋게 산을 뭉개놓은 공사장 일부가 무슨 기분 나쁜 상채기처럼 나무 사이로 보였다. 그녀와 헤어질 때가 되었다. “도와주실 거죠?”하림을 향해 그녀가 재차 다짐이라도 하듯 물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하림의 시선과 부딪혔다. 도도한 분위기의 연상의 여자가 그런 부탁을 하니까 오히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그러죠, 뭐. 도움이 될랑가는 모르겠지만.....”좋은 게 좋다고 하림은 그녀의 눈길을 피하며 싱겁게 대답했다. 안된다고 하면 대답이 복잡해진다. 변명이 필요하고, 구차한 계산이 따른다. 어차피 송사장이란 작자와는 만날 일도 없겠거니와 자기가 나서서 도와주고 자시고 할 일이 별로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 차라리 그런 일이라면 운학 이장을 찾아가는 편이 더 나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상하게 이장 이야기는 손톱만큼도 꺼내지를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이장이 자기에게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피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들리는 이야기로는 송사장이란 작자가 곧 마을 노인네들을 위한 경로잔치를 벌일 거라고 해요.”“경로잔치....?”하림은 그건 또 뭔 소리냐, 하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예. 말이 경로잔치지, 말하자면 일종의 유화작전인 셈이지요. 마을 어른들을 꾀어 여론을 자기네들 유리한 방향으로 만들려고 하는 수작이죠. 우리 아버지한테도 오라는 전갈이 왔어요. 그래도 노인은 노인이니까.”“그래요?”하림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짐짓 남의 말 하듯이 거리를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어쨌거나 조심하셔야겠네요.”이윽고 이층집 대문 앞에 다다렀다. 하림은 아까처럼 영감이 있을까, 하고 이층 베란다 창문 쪽을 흘낏 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오늘 반가웠어요. 나랑 수관 선생 댁에서 만났단 이야긴 하지 마세요.”헤어지면서 그녀는 걱정이 되는지 공연히 하지 않아도 될 토를 달았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말일까. 하림은 피식, 속으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 순간, 그녀와 수관 선생 사이에 어떤 말 못할 감정, 그것을 넘어 무언가 말 못할 사연 같은 게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분명하게 들었다. 아까 무심결에 둘이 반 말 비슷하게 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천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남녀 사이는 알 수 없다고, 자기와 하소연만 해도 비 내리던 날, 둘 사이에 그렇고 그런 사연이 있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남녀란 원래부터 은밀한 비밀의 공모자들인지도 모른다.“또 봐요.”그녀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급히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다시 예전의 냉정한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림은 잠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다가 이윽고 생각난 듯이 몸을 돌려 화실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김영현 기자 ⓒ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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