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길기자
이영표[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보자. 40여 년 전 북미 대륙에는 한바탕 축구 붐이 일었다. 한국에서도 이를 느낄 수 있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초청 팀을 아시아권에서 세계로 넓힌 박대통령배국제축구대회에는 외국의 유명 클럽이 많이 출전했다. 그 가운데에는 MLS의 전신인 NASL(North American Soccer League)의 워싱턴 디플로메츠도 있었다. 국내 팬들에게 그리 깊은 인상은 남기지 못했다. 1978년 대회에 출전했는데 국가대표 1진인 화랑과 조별리그와 결승에서 만나 각각 2-3, 2-6으로 졌다.미국은 1960년대 후반 NASL을 조직하고 축구를 뿌리내기기 위해 온갖 힘을 기울였다. 1970~80년대에는 펠레, 프란츠 베켄바워, 요한 크루이프, 조지 베스트 등을 영입하기도 했다. 거스 히딩크 감독도 1970년대 중반 워싱턴 디플로메츠 등 NASL에서 뛰었다. 리그는 1970년대 후반 절정기를 누렸다. NASL을 누빈 대표적인 한국 선수는 조영증. 국내 프로축구 출범으로 1983년 돌아왔지만 1981년 국가대표에서 물러난 뒤 포틀랜드 팀버즈에 입단했고 1년 뒤 시카고 스팅즈로 이적하며 NASL의 대표적인 수비수로 활약했다. NASL은 1980년대부터 내리막을 걸었고 결국 1984시즌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구단 확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선수들의 치솟는 몸값을 버티지 못한 탓이 컸다. NASL의 뒤를 이어 1993년 12월 출범한 MLS는 영국계 이민자가 많이 사는 북동부 지역과 한국계, 멕시코계 이민자가 몰려 있는 서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구단을 배치했다. 광활한 북미 대륙에서 축구 열기가 비교적 높은 곳을 공략한 것이다. 한때 데이비드 베컴이 뛰어 국내 팬들에게 친숙해진 갤럭시는 그 대표적인 명문 구단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워싱턴을 연고로 하는 D.C. 유나이티드와 함께 4회 우승을 거뒀다. 갤럭시는 현재 랜던 도노반(미국), 로비 킨(아일랜드) 등 유명 스타들이 주력을 이루고 있다. 박지성의 다음 행선지로 꼽히는 토론토 FC는 미국, 캐나다 외에 자메이카, 웨일즈, 잉글랜드, 네덜란드, 브라질, 아르헨티나, 버뮤다, 이스라엘,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스위스 등 13개 나라(협회)의 선수들을 영입, ‘인종 전시장’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가히 미국적인 선수 구성이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이종길 기자 leemean@<ⓒ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