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의 사생활 - 4장 낯선 사람들 (76)

‘하긴 팔 여자가 아니지. 여기저기 땅을 사 모으고 있단 이야기도 들리던데....’염소 수염 사내의 흘리듯 지나가는 그 말이 이상하게 하림의 뇌리에 가시처럼 걸렸다. 그건 지난 번 동철이랑 동묘 앞에서 봤던 윤여사의 이미지랑은 사뭇 다른 뉘앙스를 지닌 말이었다. 그때 그녀는 순진하다면 순진하게 보였고, 모자란다면 모자라게 보이는, 약간 자랑끼와 허풍끼가 섞여 있는 푼수로만 비쳤는데, 아까 운학의 말도 그렇고 지금 사내의 말도 그렇고 그건 겉보기일 뿐, 뭔가 복잡한 속내를 지닌 깍정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어슴푸레하게 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아까 운학이는 한때 사랑했다는 그녀에 대해 ‘속물’이라고 잘라 말하지 않았던가. 천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그리고 보면 아까 전화에 대고, 윤여사가 대뜸 “도둑놈...” 어쩌고 하는 목소리마저도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분명히 그건 자기가 아는 윤여사의 어투가 아니었다. 그날, 동철이 늘어놓았던 망명정부 이야기에 도톰한 입술을 비틀며 깔깔거리며 웃던 모습과도 사뭇 달랐다.하림은 점점 복잡해지려는 머리를 흔들며,“커피 드실래요?”하고 말했다.“좋죠. 이왕이면 난 곱빼기로 주쇼.”사내가 짐짓 우스개 삼아 말했다. 운학은 사내가 일을 끝낼 동안 지켜볼 요량인지 그새 아예 다리 하나가 부셔진 의자를 옆에 갖다놓고 엉덩이를 걸치고 있었다.“난 남아있는 술 있음 한잔 주면 좋겠수만.”현관으로 들어가는 하림의 등짝을 향해 운학이 비굴한 웃음을 달며 말했다. 방에 들어온 하림은 커피물을 올려놓고 박스를 뒤져 소주 팩을 하나 꺼내었다. 비상시에 자기 먹으려고 가져온 것인데 운학은 단입에 다 마셔치울 작정이나 하고 있는 성 싶었다. ‘에이, 그래봤자 얼마나 되겄나. 있다 하소연이 수퍼에 가서 또 사면 되지, 뭐.’하림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쟁반에다 아까 먹던 김 조각과 소주팩을 담고, 커피 봉지 두 개를 뜯어 사내 주문대로 양이 많이 되게 사발에다 커피를 탔다. 커피를 타며 생각했다.사실 운학의 말은 들을만한 가치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못 오를 나무에 침이나 뱉고 보자는 심보에서 나온 말일 수도 있지 않은가. 맨질맨질한 얼굴이나 튀는 차림새로 봐서 윤여사는 분명 학창시절부터 이 시골 바닥에서 그의, 아니 그들 또래 수컷들의 우상이었을 것이다. 하림이 혜경을 향해 가졌던 심경과 같은.....아까 운학 스스로 고백했던 그 자신의 말에 따르더라도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만한 사연이 있었다. 그런 그의 연정은 곧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 운학이 자신의 말에 의하자면, 조국이 자신에게 짊어준 가혹한 운명, 일테면 지뢰를 밟아 절름발이가 되어 돌아온 그 운명 등등에 의해, 영영 그녀를 가까이 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고, 남은 것은 배신감과 분노, 질투 이런 것으로 변했을 것이다. 그가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는 사실도 어쩌면 그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윤여사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건 어찌 보면 순전히 사적인 원한에서 나온 것일 지도 모른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지만, 남자라고 별로 다를 것은 없을 터였다. 그러므로 그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가 없었다.하지만 사내의 경우는 좀 달랐다. 그에게도 그런 사연이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하림의 귀에는 그의 말이 상당히 객관성이 있게 들렸기 때문이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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