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여수와 목포 등 전라남도 일원에서 열린 제89회 전국체육대회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건 수영의 박태환과 역도의 장미란이었다. 종반의 열기를 뿜고 있는 제93회 대구 전국체전의 스타는 단연 펜싱의 신아람과 리듬체조의 손연재다.두 대회의 스타들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4년 전 스타는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지만 이번 대회 스타는 2012 런던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아니다. 신아람은 런던 올림픽 에페 단체전에서 은메달을 땄지만 개인전에서는 ‘멈춰 버린 1초’에 울며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손연재는 리듬체조에서 5위를 기록했다. 두 선수는 이번 전국체전에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며 사랑을 받았다. 최근 들어 전국체전에서는 4년을 주기로 비인기 종목 선수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올림픽 특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메달리스트가 아니더라도 올림픽에서 선전한 선수들에게 체전이 열리는 지역의 스포츠팬들은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다. 오랜 기간 한국 스포츠계를 짓누르고 있던 ‘1등 지상주의’에서 벗어난, 바람직한 현상이다. 국제 대회 호성적 또는 선전이 국내 스포츠 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례로는 야구를 들 수 있다. 2006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4강, 2008 베이징올림픽 9전 전승 금메달, 2009 WBC 준우승 등은 국내 프로야구의 폭발적인 인기 상승에 크게 이바지했다. 동·하계 대회를 막론하고 2000년대 이후 올림픽에서 선전한 결과 피겨스케이팅을 비롯한 다양한 비인기 종목에서 차세대를 책임질 유망주들이 쑥쑥 자라고 있다. 올림픽이 갖는 의미는 그래서 각별하다. 선배 체육인들도 이 같은 현상을 일찌감치 내다본 듯하다.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지 불과 3개월여 뒤인 1945년 11월 26일 서울 YMCA회관에서 선배 체육인들은 일제에게 강제 해산당한 지 7년 만에 조선체육회를 재건했다. 일제 강점기에 일시 중단됐던 전조선종합경기대회도 부활했다. 1945년 10월 서울운동장(옛 경성운동장)에서 ‘자유 해방 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가 제26회 전국체육대회다. 개회식에서 태극기를 든 기수는 1936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이었다. 당시만 해도 시도 간 경쟁을 유발해 경기력 향상을 꾀하는 시도별 종합채점제는 채택되지 않고 있었다.조선체육회는 1946년 10월 16일부터 닷새 동안 서울운동장에서 ‘조선올림픽대회’를 열었다. 아직 전국체육대회라는 명칭이 정착되지 않았던 때인데다 2년 뒤 런던 올림픽 출전에 대한 열망이 ‘조선올림픽대회’라는 대회 이름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선배 체육인들은 발 빠르게 움직여 1947년 6월 스톡홀름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대한올림픽위원회(KOC)의 회원국 자격을 얻었고 이듬해 런던에서 열린 제14회 하계 대회에서 두 개의 동메달을 따 올림픽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우리나라 스포츠 발전에 든든한 발판이 된 건 말할 나위 없다. 이런 사연이 있는 대회가 바로 제27회 전국체육대회다. 60여 년 전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오직 한 나라만 출전한 ‘미니 올림픽’이 열렸다는 사실을 아는 IOC 관계자는 없을 터이다. 이 대회에는 16개 종목에 5천명이 넘는 선수들이 참가했다. 이 대회의 동계 대회는 1947년 1월 열렸는데 스피드스케이팅은 한강에서, 아이스하키는 창경원(오늘날의 창경궁) 특설 링크에서 각각 치러졌다.1947년 10월에는 두 번째 ‘조선올림픽대회’(제28회 전국체육대회)가 3천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이 대회 육상에서 1952년 헬싱키 올림픽 마라톤에서 4위에 입상한 최윤칠은 1만m와 마라톤을 제패했다. 1948년 조선체육회는 대한체육회로 개칭했고, 1945년 이후 전국종합경기대회 또는 ‘조선올림픽대회’로 부르던 대회 이름을 전국체육대회라 부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948년 10월 20일부터 1주일 동안 서울운동장에서 제29회 전국체육대회를 열었다. 대한체육회는 이어 1949년 10월 15일부터 9일 동안 서울운동장에서 제30회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했다. 종전 자유 참가였던 전국체육대회는 이 대회를 시작으로 도대항제(뒷날의 시도대항제)로 바뀌어 서울이 1위, 경남이 2위, 경기가 3위를 차지했다. 오늘날 국민적 축제로 자리를 잡은 전국체전은 선배 체육인들의 시대를 앞서가는 혜안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골프팀 이종길 기자 leemean@ⓒ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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