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락 한길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
얼마 전 '건축학개론'이라는 다소 생경한 제목의 영화가 장안에 잔잔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라는 포스터의 문구처럼 이 영화는 '건축'을 매개로 풋풋했던 첫사랑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냈고, 건축을 전공했던 영화감독의 체험이 잘 녹아들었던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다. 학창시절 나에게도 건축은 건축학개론의 그것처럼 순수함과 설레는 꿈으로 시작되었다. G.폰티의 '건축예찬'을 읽으며 건축에 매료돼 갔고 건축설계스튜디오에서의 치열했던 토론과 수업 등을 통해 건축가로서의 미래를 그려갈 수 있었다. 그러나 꿈은 꿈으로 남겨두어야만 했다.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처럼…. 내가 평생을 업으로 살아온 건축은 건축가 자신의 꿈만이 아닌 건축주의 요구, 다양한 주변 상황과의 조정 속에서 최선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결국 건축이란 주어진 한계상황에서 많은 사람과의 대화와 협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결과물 같은 것이었다. 꿈만이 아닌 주변과의 수많은 타협과 조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 현실 속의 건축이었다. 현실에서의 건축은 간단하지 않았다. 꿈을 간직하기에는 현실에서의 벽은 너무 높고 냉혹하게만 다가왔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경제적 부침은 반복되어져 왔지만 지금의 건축계는 불황의 늪이 깊어지면서 심각한 프로젝트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닌 전 세계적으로 공통의 현실이긴 하나 건축계의 어려움은 그 어느 때보다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 건축계 전반은 시장축소의 압력과 심각한 상황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런 현상은 피할 수 없게 됐다. 업체와 종사자 수가 줄고, 소위 '잘 나가던' 대학 건축학부(과)의 경쟁률도 뚝 떨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 건축설계회사의 CEO로서 꿈을 간직하고 있기에는 현실의 상황이 결코 녹록하지 않았고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해야만 하는 압박감이 강요돼 온다. 꿈이 보이지 않는 현실. 허나 불황은 우리에게 어려움을 안겨주지만 또 다른 변화와 도전의 기회를 요구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경제적 어려운 시기에 건축 또한 발전해왔다. 1930년대 경제적 불황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 운동이 왕성했고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나 록펠러센터같은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세상에 공개됐다. 불황은 변화를 촉진하기도 한다. 변화하는 환경에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대응노력을 지속하면서 미래의 시장개척에 나서야 하는 것이 현실에서의 건축이 된 것이다. 최근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대세다. 이를 대변하듯 요즘 서울 강남역 주변을 오랜만에 찾는 이들은 새로운 느낌을 주는 건물에 눈길을 멈춘다. 'GT타워'가 주인공이다. 하늘에서 출렁이는 파도가 땅으로 급히 떨어지는 느낌으로 130m높이 S라인 건물이 시선을 잡는다. 곡선미가 뛰어난 고려청자를 디자인 콘셉트로 잡았다. 건물 외벽 4개면을 모두 부드러운 곡선으로 설계한 것이 특징이다. 이 설계를 위해 일반적인 생각은 과감히 버렸다. 천편일률적인 성냥갑 빌딩숲으로 가득 찬 강남 일대에서 차별화된 외관이 건물 가치를 높이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미국 일리노이공대 학생들이 현장을 방문해 감탄사를 쏟아냈을 정도로 GT타워는 건축학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변화에 대한 대응은 무한한 노력과 희생을 필요로 하는 생존모드로의 전환을 요하는 절박함일 것이다. 나와 회사의 역량에 대한 스스로의 점검이 필요하게 되고 앞으로 무엇에 집중하여야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가에 대한 힘든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고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도전이 될 것이다. 내 젊은 시절 꿈이었던 건축은 아련하게 멀어져 갔지만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꿈을 찾아서 또 다른 길을 걸어가야만 할 것이다. 김상락 한길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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