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CEO가 있었답니다. 일년에 딱 두 번, 설날과 추석 당일을 빼고는 매일 출근하는 지독한 일 중독자인데다가 능력도 뛰어나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고, 결국엔 CEO(최고경영자)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집안 대소사는 모두 아내의 몫이었고, 아이들 입학식이나 졸업식조차 참석해 본 적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집에 일이 있다며 이른 퇴근을 했습니다. 전에 없던 일대 '사건'인지라 직원들 사이에는 억측이 난무했지만 나중에 그 조퇴가 집에서 키우던 개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졌답니다. 그룹 회장님이 며칠 전 손수 선물하신 강아지가 아프다는 전화를 받고, 개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달려간 것이었다지요. 이 이야기를 들려준 선배는, 숟가락으로 밥공기를 가리키며 말하더군요. 먹고 산다는 게 참 어려워. 굳이 그렇게까지 살 필요가 있느냐고 혀를 차다가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말할 자격이 제겐 없다는 것을요. 바쁜 직장 생활을 하던 어느 날의 일입니다. 퇴근시간이 다 되어 중요한 고객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간단히 밥이나 먹자는 것이었지요. 하필이면 아이의 생일, 가족끼리 오랜만에 저녁을 먹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절대 '갑'인데다가 아주 큰 계약이 걸려 있는 중요한 시점인지라 식사제안을 거부할 수는 없었습니다. 식사는 결국 새벽 술자리까지 이어졌지요. 아빠를 기다리던 아이는 제가 전화를 꺼버린 뒤에도 여러 번 전화해보다가 울며 잠들었다더군요. 저도 속으로 울었습니다. 머리에 넥타이를 동여매고 탁자 위에서 몸을 흔들면서, 저는 제 어깨에 걸린 삶의 무게를 저리도록 느꼈습니다. 그런 경험들 탓인지 저는 먹고 사는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당당해지라고 말하는 조언자들에게 마음이 가질 않습니다. 누군들 그걸 모르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이 워낙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족을 위해 '밥값을 버는', 그리고 그걸 위해 자존심도 종종 내려놓는 이 땅의 모든 소심한 이들에게 깊은 존경심과 소박한 공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요즈음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저를 눈물겹게 하는 이 말을 여기 저기에서 너무 쉽게 듣게 됩니다. 수억원대의 고급 승용차를 훔친 절도범도, 여러 사람의 몸을 망가뜨린 무면허 치과의사도 자신들이 먹고 살기 위해 그랬답니다. 엄청난 규모의 뇌물을 받은 공무원마저 먹고 살려고 그랬다고 장발장의 흉내를 냅니다. 바로 며칠 전에는 의사단체의 대표를 맡고 계신 분이 현재의 건강보험체계하에서는 의사들이 '먹고 살기 위해' 과잉진료와 과잉검사를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 버려도 되는 양심과 자존심의 크기가 어디까지인지, 어디까지 용서해야 하는지 고민스럽기만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신문기사 하나가 제 마음에 가시처럼 박혔습니다. 요즘 국민적인 관심이 과거의 한 사건에 쏠리는 것을 두고 어떤 국회의원이 "다들 배가 부른가 보지?"라고 말했다는 기사였습니다. 이분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집중하지 않고 양심이 어떻고 정의가 어떻고 하는 것이 무척 가소롭게 보였나 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먹고 사는 걸 희생하고 더 큰 가치를 위해 몸을 던진 사람들의 이름을 부를 때 존경심을 품을 줄 압니다. 자신이 더 많이 먹는 대신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과 나눌 줄 아는 이들을 주변에서 적잖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국회의원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모든 걸 다 잊고 오직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분투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걸 부끄럽지 않다고 여기게 된다면 세상은 얼마나 끔찍한 곳이 될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먹고 살기 위해'라는 말은 사실 '남보다 좀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라는 뜻이 아니던가요?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 교수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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