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전성호 기자]지난해 8월의 일이었다. 조광래 대표팀 감독의 데뷔전이자 2010 남아공월드컵 직후 열린 국내 첫 A매치를 앞두고 25명의 국가대표 선수들이 파주NFC에 소집됐다. 신임 감독 앞에서 눈도장을 받기 위한 선수들의 노력은 대단했다. 소집 이틀째 오후 7시 무렵, 공식훈련이 끝났다. 기자 역시 기사를 마감하고 8시가 조금 넘어 기자실을 빠져나왔다. 마침 샤워를 마친 대표팀 선수들이 식당에서 시끌벅적한 식사시간을 갖고 있었다. 저마다 이야기 보따리를 풀며 훈련의 피로를 떨쳐내고 있었다. 파주NFC 정문을 나서 얼마나 걸었을까. 인적 없는 맞은 편 길 끝에서 한 남자가 뛰어오고 있었다. 이미 땅거미가 짙게 내리깔린 탓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멀리서도 대표팀 트레이닝복을 입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모습. 아, 이근호였다.한 때 '허정무호의 황태자'로 군림했던 그였다. 남아공월드컵 최종예선에서만 3골을 넣은 것을 비롯해 허정무호에서만 무려 7골을 기록하며 한국의 7회 연속 월드컵본선 진출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호사다마였다. 야심 차게 유럽 진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지지부진한 이적 협상 속 훈련량 부족은 페이스 하락으로 이어졌다. 2009년 3월 이라크와의 평가전 페널티킥 골 이후 A매치 득점이 전무했다. 슬럼프는 계속됐고 결국 남아공월드컵을 눈앞에 둔 오스트리아 캠프에서 최종엔트리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크나 큰 좌절감에 휩싸였던 그는 조광래 감독의 부름을 받고 다시 대표팀에 돌아오게 됐다. 그런 그에겐 훈련 뒤 달콤한 휴식조차도 사치였나보다.스쳐 지나간 그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신도 모르게 '파이팅'이란 말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부활을 꿈꾸는 '태양의 아들'은 그렇게 어둠 속을 묵묵히 달리고 있었다.
하루 뒤 나이지리아의 평가전. 부활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근호는 끝내 그라운드에 나서지 못했다. 젊은 선수들을 테스트해보고 싶었던 조 감독의 의지 때문이었다. 당시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조 감독은 "개인적으로 이근호는 상당히 좋아하는 선수다. 세밀하고 득점에 대한 감각이 있다. 불행히도 오늘 이근호가 들어갈 타이밍이 없었을 뿐"이라며 아쉬워했다. 그 탓이었을까. 이후에도 슬럼프는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여유가 사라졌고 플레이는 단순해졌다. 당연히 수비수를 제치기도 어려웠고 슈팅도 위력적이지 못했다. 2010시즌 41경기에서 고작 7골에 그쳤다. 한동안 대표팀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절치부심한 그는 2011 카타르 아시안컵이 열리는 지난겨울 동안 훈련에 몰두했다. 결과는 노력을 배신하지 않았다. 올 시즌 시작과 함께 활약이 이어졌다.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와 J리그에서 3경기 연속 공격 포인트(2골 2도움)를 올렸다.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그의 플레이를 지켜본 조 감독도 만족감을 표했다. 결국 이번 온두라스전을 앞두고 대표팀 27명의 소집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사실상의 마지막 기회였다. 6월 A매치부터는 월드컵 아시아지역예선에 나설 베스트 멤버로 임하겠다는 조 감독의 공표가 있었다. 이번에 뭔가를 보여주지 못하면 이대로 또 한 번 좌절을 맛봐야 했다.그럼에도 그는 조급하지도, 더 이상 실패를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훈련에서 이근호의 몸놀림은 예사롭지 않았다. 여유와 결의가 동시에 느껴졌다. 소집 이틀째 훈련을 마친 그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오히려 주변에서 걱정하는 시선이 많다"며 "의식하지 않고 묵묵히 뛸 생각"이라고 말했다. 8개월 전 홀로 러닝 훈련을 하던 당시의 심정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확신과 자신감으로 차있는 눈빛에 더 이상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25일 온두라스전 후반 11분. 조광래 감독은 김보경을 빼고 이근호를 투입했다. 지난해 5월 벨라루스전 이후 약 10개월만의 A매치 출장이었다. 그라운드에 들어서자마자 감각적인 오버헤드킥으로 3만 관중의 탄성을 자아냈다. 자신감이 붙은 그는 날카로운 움직임으로 온두라스 골문을 위협했다.후반 24분에는 이청용의 크로스를 헤딩슈팅으로 연결했고, 1분 뒤에는 박주영의 정확한 크로스를 받아 문전에서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지만 슈팅은 골대 위를 향하고 말았다. 그래도 지켜보는 이들은 질책보다 격려의 박수와 응원을 보냈다.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그렇게 아쉬운 장면이 지나가며 경기가 끝나는가 싶던 후반 추가 시간, 마침내 그의 부활포가 터졌다. 기성용의 코너킥을 받아 그대로 헤딩슈팅, 골망을 출렁였다. 2년 만에 기록한 A매치 득점이었다. 기쁨의 포효와 함께 그동안의 마음고생도 훨훨 날려보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그는 "오랜만에 경기를 뛰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골까지 넣어 기분이 남달랐다. 찬스를 몇 개 놓치면서 부담이 있었는데 가슴이 뻥 뚫린 느낌이다"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더불어 "1분이라도 뛰고 싶었다. 후회를 하더라도 일단 경기에 나서고 싶었다"며 그동안의 마음고생에 대해서도 털어놨다.조 감독 역시 이근호를 칭찬했다. “후반에 투입됐지만 순간적인 스피드를 이용해 문전에서 기회를 포착하는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앞으로의 활약에 기대가 크다”며 그의 부활에 박수를 보냈다.이근호는 지난 22일 대표팀 소집 당시 취재진에게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브라질월드컵 본선으로 떠나는 자리에서도 꼭 인터뷰했으면 좋겠다"며 웃어보였다. 그의 말대로 2010년에 빛나지 못했던 '태양의 아들'이 올해 아시아는 물론 2014년 남미 대륙을 환하게 비출 수 있게 되길 기대해본다. 어둠 속 그 묵묵했던 러닝의 노력은 그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스포츠투데이 전성호 기자 spree8@<ⓒ아시아경제 & 재밌는 뉴스, 즐거운 하루 "스포츠투데이(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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