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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우먼톡]가장 정치적이었던 조선 여성의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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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 노론·소론 싸움서
절절한 상소로 손자 구해내

[K우먼톡]가장 정치적이었던 조선 여성의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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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장의 문서가 있다. 지금 보아도 아름다운 한글 궁서체다. 마치 그림을 그린 것처럼 곱다. 그런데 적힌 내용은 놀라울 정도로 충격적이다.


"이 몸이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하지 못할 죄를 지옵고…."


글을 쓴 사람은 자신이 크나큰 죄를 지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처음보다 더한 말로 끝을 맺는다. "이 몸만 목을 베시옵소서." 예쁜 글씨로 이처럼 무서운 내용을 적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1727년 만들어진 이 문서의 정식 명칭은 ‘고 영부사 이이명의 처 광산김씨’ 상언이다. 광산김씨는 성씨이지, 사람 이름이 아니다. 이이명의 아내이고 광산김씨 집안에서 태어난 여성이란 점만 확인된다. 조선시대에는 양반 여인들의 이름을 바깥으로 드러내는 일이 드물었다. 이름을 알 길은 없지만 그녀는 서포 김만중의 딸이며 집안에 닥쳐온 풍파를 온몸으로 막아서며 싸운 안주인이었다.


모든 일은 조선의 왕위 계승에서 시작됐다. 1690년 즉위한 장희빈의 아들 경종은 병약하고 자식이 없었다. 노론은 이복동생인 연잉군(영조)을 후계자로 세우고 대리청정을 시도했다. 신하들에게 무시당한 경종은 크게 분노해 노론을 숙청했다.


이때 광산김씨의 남편 이이명은 외아들 이기지와 함께 처형당했고, 손자 이봉상도 위기에 처했다. 광산김씨는 노비 아이의 시체로 죽은 것처럼 속이고 손자를 숨겼다.


경종이 1724년 세상을 떠나고 연잉군이 왕위에 올랐다. 영조는 자신을 지지해준 노론을 잊지 않았다. 사형당한 이이명은 복권됐고, 이봉상도 벼슬을 받았다. 광산김씨는 직접 임금에게 상언을 올렸다. 자기 가족에게 벌어진 비극을 통렬하게 전했다.


주인의 손자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 노비 아이의 이야기, 간신히 도망쳐 소식마저 끊어졌던 손자, 남편과 아들을 동시에 떠나보내고 인고의 고통을 겪었던 자신의 아픔을 절제미 넘치는 우아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아울러 영조에게 "성상께서 끊어진 세대를 이어주고 망한 것을 보존시켜주는 은혜가 다른 왕들보다 뛰어나다"고 감사했다. 상서를 본 영조는 크게 감동했다. 이봉상을 직접 만나 사정을 들었으니 광산김씨의 상서를 통한 어필은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1727년 세상은 다시금 소론의 판이 됐다. 광산김씨의 손자 이봉상과 이이명의 동생 이익명은 체포됐다. 왕명을 거스르고 숨었던 이봉상은 엄연한 죄를 저질렀고, 이익명은 이걸 모른 척해준 혐의가 있었다.


다시금 찾아온 환란 앞에서 광산김씨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두 번째 상언을 썼다.


"이봉상이 왕명을 어기고 숨은 것은 잘못이지만, 이 모든 것은 내가 저질렀다. 손자는 할머니의 말에 따른 것이고, 이 일이 벌어졌을 때 시동생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모두 내 죄이니, 나를 벌해라!"


광산김씨는 노론 가문을 지키는 방패로 나서 모든 죄를 자신에게 돌렸다. 왕의 마음을 흔들었던 첫 번째 상언 못지않게 두 번째 상언도 애절하고 간절하며 통렬했다. 남편과 아들을 잃은 기구한 처지를 호소 수단으로 삼되 정적인 소론에 대한 비난도 적절하게 집어넣었다. 이 상서로 광산김씨는 손자를 구해냈으며, 그녀의 목소리는 가장 정치적인 조선 여성 발언의 예로 남았다.




이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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