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고재, 엄정순 개인전 '보푸라기-촉각적 사건'
작아진 코끼리, 낮아진 시선…가까이 가야만 보이는 전시
권력 상징에서 감각·경험으로…시각 흔드는 촉각적 실험
손끝에 남은 기억들…만지는 감각으로 다시 묻는 '본다'는 일
전시장 입구에는 코끼리 세 점이 놓여 있다.
눈으로 훑고 지나가기에는 작고, 멀찍이서 보라고 놓인 것도 아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손이 닿는 거리에 있다. 전시는 이 낮은 위치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 코끼리는 우리가 익숙하게 떠올려온 모습과는 다르다. 한눈에 파악되는 형상이 아니라, 잘린 모서리와 사라진 윤곽, 그리고 보푸라기 같은 흔적들로 존재한다. 코끼리는 여전히 이 전시의 중심에 있지만 더 이상 '보여주기 위해' 서 있지는 않다. 오히려 손끝에서 더듬다 스쳐 지나간 감각처럼 남는다.
2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학고재에서 개막한 엄정순 개인전 '보푸라기-촉각적 사건'은 '보는 것'보다 '겪는 것'에 가까운 전시다. 작가는 오랫동안 코끼리를 권력과 거대함의 상징으로 다뤄왔지만, 이번 전시에서 그 상징은 분절되고 흐릿해진다. 코끼리의 코는 사라지고, 전체는 부분으로 나뉜다. 완결된 형상 대신 남은 것은 파편과 잔여물이다.
작가는 이 불완전함을 결핍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부분이야말로 전체로 가는 통로라고 말한다. 인간은 언제나 대상을 부분으로만 만난다는 것, 그리고 그 부분들이 쌓일 때 비로소 세계가 열린다는 믿음이다. 맹인이 코끼리를 만지며 각자의 감각으로 전체를 상상하는 불교의 비유가 이 전시에서 다시 호출된다. 하나의 중심 대신 여러 개의 시작점. 관객은 어느 모서리에서든 전시에 들어설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단어는 '보푸라기'다. 비엔날레에서 관객들이 작품을 만지며 생겨난 보푸라기는 보통이라면 제거됐을 흔적이다. 그는 그것을 수많은 체온과 마찰, 감정과 시간이 겹쳐진 결과로 읽는다. 폐기되어야 할 잔여물은 이 전시에서 가장 적극적인 재료가 된다. 만지는 행위는 흔적을 남기고, 동시에 이미지를 지운다.
이 흐름은 회화에서도 이어진다. 색은 상징을 설명하기보다 리듬처럼 퍼진다. 특히 초록은 의미를 지시하기보다 신체의 상태를 암시하는 감각으로 작동한다. 화면은 메시지를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감각의 진동을 남긴다.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어떻게 남느냐에 더 가까운 회화다.
전시장 한편에 놓인 점자 책 작업은 이 전시의 질문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흑연으로 쓰인 책은 만질수록 글자가 뭉개진다. 읽는 행위는 곧 지워내는 행위가 된다. 책 속의 코끼리는 사라지지만, 손끝에는 검은 흔적이 남는다. 눈으로 읽을 수 있는 정보는 사라지고, 몸에 남은 감각만이 지속된다. 작가는 이를 '읽기의 역설'로 제시한다.
전시 제목에 등장하는 '사건'은 거창한 계기를 뜻하지 않는다. 여기서 사건은 관점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순간에 가깝다. 만짐과 마찰, 시간의 누적 같은 사소한 행위들이 감각의 위계를 재배치한다. 시각 중심의 인식에서 벗어나 감각들이 수평으로 놓이는 순간, 전시는 비로소 작동한다.
전시를 다 보고 나면 코끼리는 명확한 이미지로 기억되지 않는다. 대신 어딘가에서 만졌던 감각처럼 남는다. 작가는 관객이 코끼리를 '이해'하기보다 '겪고 지나가길' 바란다. 언어로 설명되지 않아도, 몸에 남는 무엇. 그것이 이 전시가 남기고자 하는 최소한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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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을 나서며 손을 한 번 내려다보게 된다. 무엇을 만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감각은 아직 사라지지 않는다. 전시는 3월 28일 까지.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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