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배우' 안성기 별세…170편 필모그래피
배역에 인품 녹여낸 '안성기식 리얼리즘'
억압과 변화 관통한 충무로의 영원한 앵커
배우 안성기의 부고는 단순한 이별 통보가 아니다. 한국 영화사의 거대한 한 챕터가 닫히는 사건이다. 1950년대 데뷔부터 2020년대까지, 그는 한국 영화의 태동과 중흥, 르네상스를 온몸으로 관통한 유일한 증인이었다. 스크린 속 얼굴은 단순한 연기가 아니었다. 억압된 시대의 울분이었고, 변화하는 사회의 욕망이었으며, 끝내 우리를 안아주는 위로였다.
천재 아역에서 '시대의 얼굴'로…한국적 리얼리즘의 탄생
안성기의 연기 인생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1957년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로 데뷔해 '하녀(1960)' 등에서 활약한 아역 시기가 1막이라면, 성인이 돼 돌아온 1980년 이후가 2막이다. 주목해야 할 지점은 그가 1960년대 후반부터 10년 가까이 가졌던 공백기다. 베트남어 전공 대학생, 학군단(ROTC) 장교,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았던 이 경험은 훗날 연기에 결정적인 자양분이 됐다.
1980년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로 복귀했을 때, 안성기는 충무로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당시 한국 영화는 신성일로 대표되는 '잘생긴 스타'들의 과장된 발성(후시 녹음 특유의 성우 톤)과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주류였다. 안성기가 연기한 중국집 배달부 덕배는 달랐다. 그는 더듬거리는 말투, 어수룩한 표정, 생활감이 묻어나는 몸짓으로 '진짜 사람'을 연기했다.
새로운 공기는 1980년대 '코리안 뉴웨이브'의 시작점이었다. 정성일 평론가는 이를 두고 "한국 영화에 일상의 리얼리즘을 이식하며 연기의 역사를 바꾼 분기점"이라고 평가해왔다.
이후 안성기의 얼굴은 시대의 모순을 비추는 거울이 됐다.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1984)' '깊고 푸른 밤(1985)'에서 그는 가난한 빈민이자 좌절하는 낭만주의자였고,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1981)'에서는 세속과 구도 사이에서 번뇌하는 지식인이었다. 군사정권 시절, 관객들은 화려한 영웅이 아닌 그의 맑고 슬픈 눈을 보며 억눌린 시대의 울분을 위로받았다.
파격을 넘어 전설로…장르와 세대를 관통한 배우
민주화 이후 소재의 제약이 풀린 1990년대, 안성기의 연기 스펙트럼은 폭발적으로 확장됐다. 가장 극적인 변신은 강우석 감독의 '투캅스(1993)'였다. 진지하고 바른 생활 이미지가 강했던 그는 부패에 찌든 고참 형사 역을 맡아 능청스러운 코믹 연기를 선보였다. "안성기는 코미디가 안 된다"는 편견을 보란 듯이 깬 이 작품은 한국형 버디 무비의 전형이 됐다.
그 무렵 정지영 감독의 '하얀 전쟁(1992)'에서는 베트남전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소설가로 분해 전쟁의 광기와 허무를 처절하게 묘사했다. 이처럼 그는 작가주의 영화와 상업 오락 영화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당대 유일한 배우였다.
2000년대 들어 영화 산업이 대기업 자본 중심으로 재편되며 많은 중견 배우가 자리를 잃었을 때도 안성기는 건재했다. 특히 2003년에는 영화 '실미도'의 교육대장 역으로 "날 쏘고 가라"는 명대사를 남기며 한국 영화 사상 첫 1000만 관객 시대를 열었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는 "충무로에 젊은 스타들이 쏟아질 때도 영화의 무게중심을 단단히 잡아준, 한국 영화의 앵커(닻)"라고 비유했다.
그의 연기론은 독특했다. 자신을 지우고 배역에 빙의하는 '메소드 연기' 대신, 배역을 자신의 인격 안으로 끌어안아 '안성기화(化)'했다. 생전 그는 "배우는 그 사람의 인품과 향기가 역할에 묻어날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말했다. 악역을 맡아도 그 안에 일말의 연민이나 인간적인 고뇌를 심어 입체감을 부여하는 것, 그것이 안성기식 연기의 정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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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상자료원은 2017년 안성기 데뷔 60주년 특별전을 마련하며 다음과 같이 그를 소개했다. "한국 영화가 가장 초라했던 시절에도, 가장 화려했던 시절에도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필모그래피를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한국 영화사는 설명된다." 170여편의 필모그래피. 그것은 단순한 영화 목록이 아니다. 우리는 오늘, 한국 영화의 가장 아름다웠던 챕터 하나를 덮는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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