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장 사로잡은 '매운맛 K라면'
새로운 전환점 준비…건강·지속가능·다양성 고민
"입에 불이 나는 고통인데, 또 먹고 싶다." 전 세계 유튜버들이 삼양식품의 '불닭볶음면'을 먹고 남긴 반응이다. 매운 라면을 음료 없이 먹는 '파이어 누들 챌린지(Fire Noodle Challenge)'는 단순한 콘텐츠를 넘어 하나의 놀이가 됐고, K라면은 그 자체로 문화가 됐다.
이제 라면은 단순한 인스턴트 식품이 아니다.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콘텐츠형 식품'이자 K푸드의 상징이다. 특히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K라면을 찾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 글로벌 농식품 데이터 플랫폼 트릿지(Tridge)에 따르면 삼양 '불닭 시리즈'는 미국 인스턴트 누들 인기 제품 20위 안에 무려 4개가 들었다. '불닭 스파이시'는 2위, '까르보나라'는 4위에 올랐고, 오뚜기의 '진라면 매운맛 컵'도 8위를 기록했다.
미국 내 K라면 시장 점유율은 44.7%에 달한다. 일본과 동남아시아 라면 브랜드를 제치고 '매운맛' 하나로 세계 시장을 공략한 결과다. 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 유럽에서도 삼양의 '불닭볶음면', 농심의 '신라면'이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열풍은 언젠가 식는다. K라면이 글로벌 시장에서 생존하고 지속적인 성장세를 이어가기 위해선 새로운 전환점이 필요하다. 가장 먼저 짚어야 할 과제는 '건강성'이다. 강한 자극은 소비자의 관심을 끌지만 동시에 규제의 대상이 되기도 쉽다.
실제 싱가포르는 2027년부터 나트륨 함량이 높은 라면에 뉴트리-그레이드(Nutri-Grade) 'D' 등급을 매기고 광고를 제한할 계획이다. 'D 등급'은 '건강에 가장 좋지 않은 식품'이라는 뜻이다. 유럽과 북미도 고염 식품에 대한 경고 수위를 높이고 있다. 지난해 6월 덴마크 식품청은 삼양의 '불닭볶음면' 3종을 급성 중독 우려로 리콜했고, 한국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이의 제기로 철회했다.
가격 경쟁력 또한 불안 요소다. 미국에서 불닭 까르보나라(5입)는 6.88달러, 10종 혼합 세트는 18.59달러에 판매된다. 유럽에선 불닭 5입이 10달러를 넘고, 신라면 20입은 29달러에 달한다. 일본·태국·중국의 경쟁 제품보다 두 배 이상 비싸다. 지금까지는 '프리미엄 맛'과 '콘텐츠성'이 가격을 정당화해줬다. 하지만 전 세계가 고물가 시대에 접어든 지금, 브랜드 충성도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따지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고, 아시아 전역에서 매운맛을 앞세운 대체상품이 등장하고 있다.
이제 K라면은 '불닭 이후'를 고민해야 할 때다. 발효 식문화 기반의 김치·된장·고추장 라면이나 고단백·저염·비건 제품처럼 글로벌 식품 트렌드를 반영한 새로운 라인업이 필요하다. 콘텐츠형 식품을 넘어 건강과 지속 가능성, 그리고 다양성이라는 삼박자를 갖춘 '일상 식사형 식품'으로의 진화가 필요하다.
국내 식품기업들도 포트폴리오 확장에 나서고 있지만 '불닭'에 이어 세계 시장에서 통할 만한 후속 주자는 아직 없다. 지금이 '포스트 불닭' 시대를 위한 투자와 기획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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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라면의 세계화는 단지 '맵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익숙하지 않은 자극을 새로운 감각으로 승화시킨 한국 식문화의 창의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트렌드는 바뀌고, 미각과 기준도 달라진다. 매운맛 하나로 이룬 세계화, 그 다음은 다양성이다.
임혜선 기자 lhsr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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