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물의 연대기'
美작가 리디아 회고록 국내 첫 출간
가정폭력·방관·마약·이혼·유산까지
삶을 잃어버린 내가, 나를 찾는 여정
"고통은 이겨냄 아닌 함께 흐르는것"
"삶의 작은 비극들을 이겨내고 살아가기란 고되다. 비극들은 뇌 속에 있는 커다란 싱크홀 안으로 푹 빠졌다가 다시 올라오고, 그 사이에서 부풀어 오르기도 한다."
미국 작가 리디아 유크나비치가 2011년에 쓴 회고록 ‘물의 연대기 (원제: The Chronology of Water·숨을 참던 나날들)’가 국내에서 첫 출간됐다. 보통의 자서전이 그러하듯 성공과 회복이라는 익숙한 서사를 기대하고 책장을 펼쳤다면 꽤 당황스러울 것이다. 촉촉한 공기와 하얀 모래사장이 반짝이는 바다의 풍경을 기대했다가 온몸으로 파도를 받아내야 하는 것처럼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그 안에는 불편하고 어둡고, 때론 숨 막힐 정도로 날것의 감정들이 가득하다.
리디아의 삶은 절망의 연속이었다. 아버지에게 당한 끔찍한 학대, 알코올 중독자이자 우울증을 앓던 어머니의 무기력한 방관, 그런 부모를 견디지 못하고 집을 떠난 언니. 유일한 안식처였던 물속에서도 그녀는 끝내 버텨내지 못한다. 수영 선수로서의 미래를 앗아간 마약, 두 번의 대학 중퇴와 이혼,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떠난 딸까지…. 그녀의 삶은 점점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무너진 가정에서 자란 한 아이의 삶은, 결국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불행의 고백이 아니다. 삶이 반복해서 가라앉았음에도, 그녀는 그 밑바닥에서 버텼다. 생의 가장 어두운 강바닥을 응시하며 고통을 껴안고, 그 안에서 말하고, 기록하며, 물처럼 흘러갔다. 이 책은 폭력과 중독, 상실과 자기파괴의 파도를 견디며 ‘무(無)’의 심연에 잠겼던 작가가 다시 ‘나’로 떠오르기까지의 치열한 여정을 담았다. 찢긴 몸의 기억에서 길어 올린 삶의 조각들, 그리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직면한 한 인간의 솔직한 숨소리가 담겨 있다.
"삶의 어떤 파도는 피할 수 없으며, 어떤 상처는 완전히 아물지 않는다."
작품은 말한다. 찢긴 존재들 또한 여전히 흐를 수 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처럼 형태를 바꾸며, 부서진 채로도 흐를 수 있다고 말해준다.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그 고통과 함께 흘러가는 삶도 여전히 가능하다는 것. 절망을 파고드는 이야기가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흐름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의 이야기. 그것은 포기가 아니라, 생존의 또 다른 방식일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고통이 어떻게 문장이 되고, 그 문장이 어떻게 생존의 도구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이 책은 고통을 껴안은 이들의 연대이기도 하다. 삶의 방향을 잃은 이들, 상처 입은 이들, 다시 자신을 써 내려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건넨다. 고통의 시간을 ‘이겨냈다’기보다, 고통과 ‘함께 흘렀다’고 말하는 리디아의 목소리는 때로는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때로는 숨김없는 감정으로 독자의 마음 깊은 곳에 박힌다.
숨을 참던 나날들은 결국 수면 위로 떠오르는 모든 것들의 아름다움을 위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부서졌을지라도, 우리는 세상과 마주하며 물처럼 흐를 수 있다. 아름다운 것들, 우아한 것들, 희망의 조각들은 종종 가장 어두운 곳에서 피어난다. 마치 리디아의 문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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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연대기 | 리디아 유크나비치 | 임슬애 옮김 | 문학사상 | 404쪽 | 1만8000원
어강비 기자 uhkb8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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