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현재 사용되는 어휘들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유사한 언어들이 어떤 경쟁을 거쳐 살아남았는지, 또 그렇게 살아남은 어휘가 현대인의 사고 체계와 세계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아본다. 공룡은 그 사례 중 하나다. 공룡을 뜻하는 영어 dinosaur는 '무서울 정도로 큰 도마뱀'을 뜻한다. 하지만 한자로는 '두려운 용'을 의미한다. 사우루스(sauros)를 '용'으로 번역하고, 그 앞에 '두려운'이라는 의미의 '공(恐)' 자를 붙여 '공룡'이라는 새로운 번역어를 만든 것이다. 과학 용어 17개를 중심으로 과학과 사상의 본류를 탐색한다.
《옥스퍼드 영어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에 따르면, 영어 science (프랑스어 science)가 등장한 것은 이미 14세기 중반 무렵부터였다. 그런데 당시 이 어휘도 오늘날의 과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라틴어 '스키엔티아'와 마찬가지로 '아는 것' 또는 '지식 일반'을 의미했다. 당시의 문헌들에서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과학과 가까운 어휘를 찾자면, 영어 science나 라틴어 scientia가 아니라 오히려 '자연철학philosophiæ naturalis'이라는 어휘였다. 아울러 그러한 탐구자들을 사람들은 natural philosophers(자연철학자들) 또는 virtuosos(거장들), savant(학자) 등으로 불렀다. 예를 들어, 아이작 뉴턴은 1687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일명 《프린키피아》라는 라틴어 저서를 집필했는데,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스스로의 학문을 '과학'이 아니라 '자연철학'이라고 불렀다. <17쪽>
이만규는 언어학자 이윤재李允宰가 상하이로 가서 김두봉이 만들었던 과학 어휘들의 일부를 적어왔다고 밝히고, 순수 우리말로 된 물리학?화학?수학 관련 술어 약 521개를 소개했다. 예를 들어, 김두봉은 물리학을 '몬결갈'로, 역학을 '힘갈', 운동을 '움즉', 관성을 '버릇', 중력을 '부재힘', 만유인력을 '다있글힘', 구심력을 '속찾힘', 원심력을 '속뜨힘' 등으로 썼다. 김두봉의 제안은 근대화를 거치며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던 외래어 문제를 되돌아보고, 그것을 순수 우리말로 바꾸고자 했던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124쪽>
오늘날의 technology에 가까운 어휘로는 오히려 라틴어 '아르스ars(영어 art)'가 근대 초기까지도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종래의 장인적 기술을 넘어서는 기계적 산업이 성장하면서 공장이나 생산 현장에서의 art를 종래의 학문이나 예술, 수공업으로서의 art와 구분할 필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즉, art 중에서도 '기계적 기술mechanical art'이라는 어휘가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16세기 프랑스 철학자이자 교육 개혁자였던 피터 라무스Peter Ramus는 아르art를 자유로운 기술liberal art과 기계적 기술mechanical art로 나누고, 라틴어 technologia를 그것들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130~131쪽>
오늘날 technology는 보통 '기술'로 번역되지만, 전통적으로 '技術'이라는 한자어는 이 technology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 즉, 한자어 技術은 사마천의 《사기史記》(기원전 91년경) <화식열전貨殖列傳> 제1절에서 그 이른 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 “의사나 방사 등 여러 가지로 먹고사는 기술자들이 정신을 애태워 가며 재능을 있는 대로 발휘하는 것은 양식을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醫方諸食技術之人, 焦神極能, ?重?也”라는 구절이다. 《사기》의 <화식열전>은 농업?수산?상업 분야에 관한 각 나라의 물산들과 제철?야금?주물 등의 공업 분야를 소개하는 것으로, 위 문장에서 '기술'은 의사나 방술사들의 '솜씨' 혹은 '재능'의 의미였다. <132~133쪽>
영어 dinosaur가 '무서울 정도로 큰 도마뱀'을 의미하는 것과는 달리, 공룡은 한자적으로는 '두려운 용'을 뜻한다. 마타지로는 고토와 마찬가지로 사우루스sauros를 '용'으로 번역하고, 그 앞에 '두려운'이라는 의미의 '공恐' 자를 붙여 '공룡'이라는 새로운 번역어를 만든 것이다.그러나 마타지로가 만든 어휘인 '공룡'보다는 오언이 만든 어휘, 즉 '무서울 정도로 큰 도마뱀fearfully great lizard'이라는 원어 개념에 더 충실한 번역어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공룡' 대신에 '공척恐?' 혹은 '공석恐?'이라는 어휘를 사용했다. '공척'이나 '공석'은 도마뱀을 가리키는 한자어 '도마뱀 척?'이나 '도마뱀 석?' 자에 '두려울 공' 자를 붙인 것이다. <267~268쪽>
Speed를 속력으로, velocity를 속도로 번역하면 혼란이 사라질 것 아닌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혹자는 속도를 속력으로, 속력을 속도로 바꿔 쓰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속도의 도度는 '~하는 정도'를 가리키고, 속력의 력力은 '~하는 힘'을 가리킨다. 따라서 어원상 '속도'의 '도'는 온도, 밀도, 습도처럼 '어떤 것의 정도'를 나타내기 때문에 크기만을 나타내는 스칼라값에 가까운 반면, 속력의 '력', 즉 힘은 작용하는 방향이 중요하므로 벡터값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것이다. <304쪽>
과학 용어의 탄생 | 김성근 지음 | 동아시아 | 372쪽 | 2만20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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